메릴 스트립에 대한 반성문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도훈 작가는 과거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결국 좋아하게 된 대상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어요. 취향의 변화도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도 큰 영향을 주는데요.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묘사한 대상의 정보를 읽다 보면 어느새 지적인 만족감이 차오른답니다. 이번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전설이 된 여배우 메릴 스트립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90%는 “어디서 니가 감히”라는 말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연기의 신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도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그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리 설명하자면 이 칼럼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지 않았으나 결국 좋아하게 된 것이 주제다. 그러니 결국 이 글은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게 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화를 내지 마시고 일단 들어보시라.

더스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의 한 장면

내가 처음 본 메릴 스트립의 영화는 1980년대 MBC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였을 것이다. 가정에 무심한 남편(더스틴 호프먼)과 집을 나간 아내(메릴 스트립)가 아들의 양육권을 두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지금 다시 돌아보자면 이 영화는 가히 시대적이다. 주부로 일하던 여성이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쟁취하는 과정을 그리는 여성주의적 영화인 동시에, 결국 스타인 더스틴 호프먼이 연기한 남편의 부성애에 더 초점을 맞추는, 여전히 조금은 가부장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시대의 진보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적이라는 이야기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가 방영된 1980년대 말, 이미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기파 배우로 불렸다. 그 시절에는 ‘외모는 특출나지 않지만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배우’가 주로 연기파 배우에 속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여러모로 편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연기파 배우’로 불리던 이들은 대개 남자였다. 이를테면 1970년대 등장해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같은 배우들이다. 여성 배우에게는 여전히 육체적 매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은 아름답지 않으면 배우가 되기 힘들었다. 남성은 아름답지 않아도 배우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딱히 다르진 않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도록 하자.

‘연기파 배우’로 불리며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메릴 스트립의 출세작이었다. 1970년대 초반 연극배우로 데뷔한 그는 1978년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한 ‹디어 헌터›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메릴 스트립의 전성기였다. 1981년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그는 이듬해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전설적인 환경운동가 캐런 실크우드를 연기한 ‹실크우드›로 다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1985년 로버트 레드포드와 출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또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1988년에는 ‹어둠 속의 외침›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메릴 스트립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소피의 선택›(1982) 포스터

여기서 기나긴 리스트를 잠시 멈추자. 나는 그의 수상 경력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후에도 계속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지금까지 노미네이트된 횟수는 총 21회로 오스카상 역사상 최대 후보 기록이다. 그중 세 번 수상했다. 그는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배우다. 거대 예산이 들어간 상업 영화에는 좀처럼 출연하지 않은 탓에 대중적인 흥행작은 드문 편이다. ‹디어 헌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맘마 미아!›(2008) 정도가 메릴 스트립의 드문 상업적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진중한 영화에 출연해 완벽할 정도로 기술적인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1970~80년대의 메릴 스트립은 확실히 ‘여배우’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했다. 그는 상업적 성공작 없이도 여배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일종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메릴 스트립이 출연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맘마 미아!›(2008)의 한 장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한 장면

그렇다면 메릴 스트립 이전에는 그런 배우가 없었다는 이야기일까? 나는 그렇다고 감히 주장할 참이다. 할리우드는 (충무로도 마찬가지지만) 남성 배우에게는 강요하지 않는 성적 매력을 여성 배우에게 강요해왔다. 당신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을 떠올려 보시라. 그레타 가르보,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먼, 소피아 로렌, 심지어 ‘연기의 신’으로 간주되던 캐서린 헵번까지, 모든 배우들은 육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렇다면 남성 배우는? 물론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캐리 그랜트는 아름답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남성 배우 리스트에는 험프리 보가트와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임스 캐그니와 스펜서 트레이시의 이름도 있다. 그들이 아름다운 배우일까? 그럴 리가. 개성 있는 외모, 이를 이용한 캐릭터로 사랑받았던 배우들이다. 이상할 정도로 위대한 여성 배우 리스트에는 그들과 비슷한 성격의 배우가 드물다. 지나칠 정도로 드물다.

메릴 스트립은 어쩌면 할리우드 역사상(혹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신이 빚은 듯한 외모와 성적 매력이 아니라 연기 그 자체로 위대한 배우 리스트에 오른 여성 배우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나는, 혹은 젊은 시절의 나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기술적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기술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4회 수상한, 아마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일 캐서린 헵번도 메릴 스트립을 싫어했다. 2003년 작고한 그의 전기 『케이트를 기억하며』에는 그가 좋아한 배우와 싫어한 배우에 대한 아주 솔직한 평가가 들어있다. 그는 메릴 스트립을 두고 “지나치게 지적인 데다 테크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배우”라며 아예 ‘가장 싫은(Least favorite)’ 여성 배우라고 혹평했다. 캐서린 헵번을 존경하던 메릴 스트립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서린 헵번

그건 온당한 비판이었을까? 위대한 캐서린 헵번의 의견에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럼에도 헵번이 ‘할리우드의 과거’에 머무른 대가였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메릴 스트립은 이전의 여성 배우에게 당연히 요구되던 많은 것을 갖추지 않은 채 커리어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해낸 배우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메릴 스트립이 지나치게 기술적으로만 연기하는 배우라는 편견을 벗어던지는 중이다. 왜냐고? 그가 기술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기술적인 배우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기술적인 남성 배우들을 “자연스럽지 못하다”라느니, “지나치게 테크닉에 의존한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로버트 드니로는 딱히 자연스러운 배우가 아니다. 그가 출연한 1970~80년대 영화를 보면 놀랄 정도로 기술적이다. 최근 출연한 코미디 영화에서도 나는 딱히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기술적이다. 메릴 스트립 또한 커리어 후반부에 출연한 코미디 영화들에서 여전히 기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맘마 미아!›, ‹줄리&줄리아›(2009), ‹철의 여인›>(2011)에서 그가 선보인 연기는 기막히게 기술적이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한 기술적 연기로부터 감정을 폭파시킬 줄 아는 배우다. 나는 그걸 지난 몇 년 사이에야 겨우 깨달았다. 남성 배우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여성 배우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그러니까 성격이 강한 남성 CEO는 뭔가 독특한 천재로 간주하면서, 같은 결의 여성 CEO는 ‘드세다’고 표현하는 우리의 깊은 편견과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남자들은 종종 이렇게 어리석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에 관한 이번 글은 다른 여성 배우의 이야기로 마무리해 볼까 한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다. 미셸 파이퍼는 1980년대 내내 ‘섹시한 여성의 몸에 갇힌 연기파 배우’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대단히 비뚤어진 평가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출연한 ‹위험한 관계›(1988), ‹사랑의 행로›(1989), ‹러브필드›(1992)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꾸준히 올랐지만, 계속해서 아름다운 금발의 외모로만 평가받았고, 마블의 ‹앤트맨› 시리즈에 출연하기까지 한때 거의 중요한 출연작이 없었다. 메릴 스트립과 미셸 파이퍼는 전혀 다른 편견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두 위대한 배우는 어쩌면 우리가 여성 배우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살아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 파치노와 드니로의 자리에 스트립과 파이퍼를 올리자. 그렇다. 이건 기나긴 반성문이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