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남은 청춘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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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슬램덩크› 열풍입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 한국에서는 1992년 첫선을 보인 만화 ‹슬램덩크›의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얼마 전 개봉했기 때문이죠. 일본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만화로 꼽히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30년 세월을 넘어 다시 한번 한일 양국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이미 ‹슬램덩크›에 대한 글을 쓴지라 지독히도 써지지 않았다고 고백한 김도훈 작가의 ‹슬램덩크› 글을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사실 이 글은 지난주에 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쓰지 못했다. 큰일이다.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매체에, 지나치게 많은 ‹슬램덩크› 관련 글을 써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구글이나 소셜 미디어에 ‘슬램덩크’를 검색해보시라. 과거의 영광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며 울부짖는 엑스세대 아재들의 글, 그게 보기 싫다고 불평하는 Z세대의 글, 그 사이에서 마음껏 좋아하면 아재 취급을 받지 않을까 갈팡질팡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글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전자다. 1976년에 태어났으니 확실히 엑스세대다. 아재다. 모든 엑스세대 아재가 ‹슬램덩크›를 좋아했던 건 아닐 것이다. 나도 딱히 그걸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슬램덩크›를 읽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농구를 좋아한 적이 없다. 당시 한국에서 농구의 인기는 점점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농구대잔치’가 야구를 위협할 정도로 폭발하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슈퍼스타 농구선수였을 문경은이 프로에 데뷔한 시기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4년이었다. 다만 마이클 조던의 이름은 모두가 알았다. 농구는 확실히 미국의 스포츠였다.

나는 농구가 싫었다. 농구라는 이름부터 싫었다. 싫어하는 걸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건은 고등학교 1학년 체육 시간에 벌어졌다. 왜 체육 선생이 농구를 실기평가에 어울리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던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실기는 간단했다. 코트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농구공을 드리블해 골대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일단 드리블은 가능했다. 문제는 골이었다. 아무리 골대를 향해 공을 던져도 도무지 바스켓에 들어가질 않았다. 대여섯 번을 실패하자 애들이 응원을 시작했다. 내 삶이 농구 만화라면 열띤 응원을 받는 순간 “대지여, 바다여, 산이여,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여. 아주 조금씩 나에게 원기를 나눠 줘!”라고 외치며 멋지게 골대에 공을 넣었을 것이다. 인생은 만화가 아니다. 그로부터 나는 운동장 한쪽에 있는 농구장 출입을 영원히 (심적으로) 금지당했다.

잘된 일이었다. 나는 어차피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나는 그저 스포츠 선수들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면 스탠드에 앉아 농구하는 친구들을 감상하며 ‹슬램덩크›를 읽었다. 몰래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그건 내가 남자 고등학교라는 약육강식의 피라미드에서 본질적으로 최하위에 속하는 허약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고등학교 3년과 군대 2년 중 무엇을 다시 겪겠냐고 말한다면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군대를 선택할 것이다. 군대에는 규율이라도 있다. 그 시절 고등학교에는 규율도 없었다. 내가 무슨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건 아니다. 그럼에도 1990년대의 고등학교는 세렝게티에 가까웠다. 거기서 나의 위치는 약간 발이 빠른 톰슨가젤 정도였을 것이다. 덩치가 크면 물소라도 되었겠지만 165cm가 채 되지 않는 키로 그런 위치를 점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송태섭이 되었다. ‹슬램덩크›를 읽는 동안 나는 송태섭이었다. 160cm대의 키로 도내 최고의 가드가 되고 싶은 송태섭이었다. 특히 나는 송태섭이 교화되기 전 정대만 일행과 맞서 싸우는 장면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송태섭은 작은 키라는 육체적 약점을 뛰어넘기 위해 빠른 스피드와 지형지물을 싸움에 이용했다. 그는 싸울 때마다 책상 같은 물건을 딛고 뛰어서 발로 상대방을 가격했다. 바로 그거였다. 나는 교실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책걸상을 집어던지며 과하게 장난을 거는 놈들을 보며 ‘지금 책상을 딛고 뛰어서 발로 머리를 가격한다면 충분히 저놈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하는 망상을 하곤 했다. 이 망상을 가장 훌륭하게 극화한 것은 웨이브Wavve의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영웅 Class 1›이다. 아직 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반드시 보길 권한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다. 톰슨가젤은 사자에게 덤비지 않는 법이다. 톰슨가젤은 오히려 톰슨가젤과 파벌을 나눠 싸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걸 통해 ‘약자의 연대’ 같은 건 좀처럼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뼈아픈 사실을 배웠다. 약자의 연대가 그렇게 잘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학교 폭력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따져보자면, 나는 ‹슬램덩크›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탐독하던 아다치 미츠루(安達充)의 세계가 오히려 나에게 딱 맞는 만화였다. ‹터치›와 ‹H2›의 온건한 세계야말로 내가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할 젊음의 유토피아였다. 아니, 생각해보시라.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양아치다. 교실에서 난리를 피우는 양아치들과 함께 살면서 양아치가 주인공인 만화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슬램덩크›는 일종의 판타지였다. 온갖 양아치가 다 등장하지만 희한하게 온건하고 바람직했다. 양아치는 양아치와 싸웠다. 양아치가 보통의 학생들을 건드리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양아치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각자의 청춘이 있었다. 각자의 꿈이 있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가 선택한 것이 그가 좋아하던 스포츠인 농구였을 따름이다. ‹슬램덩크›가 그냥 농구 만화였다면, 나는 그 만화의 모든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애장판을 사들이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중년과 함께 풋내기 슛을 흉내 내며 눈물을 쓱 닦지는 않았을 것이다. ‹슬램덩크›는 농구 만화가 아니었다. 그건 당시 청춘이던 나조차도 꿈꾸지 못했던 청춘의 절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키 작은 약골의 모범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덕에 이렇게 글을 써서 먹고사는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그 시절 마음속의 나는 송태섭이었다. 종종 강백호였다. 가끔 서태웅이었다. 때로는 심지어 양호열이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우리는 우리와 닮은 캐릭터를 우상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순간 되고 싶은 캐릭터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 그런 캐릭터는 우리 자신과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우리 상상 속의 우리는 정치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악인을 목격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를 시원하게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는 당신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것이다.

‹슬램덩크 더 퍼스트› 공식 티저 이미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되었나. 소설가 김애란의 위대한 표현처럼,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됐다. 당신은 자라 겨우 당신이 됐다. 우리는 자라 겨우 우리가 됐다. 자라면서 우리는 우상을 잃었다. 모든 우상은 우리와 함께 자라 겨우 그런 존재가 됐다.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만화적 우상을 떠나보냈다. 그 시절 열광하던 많은 만화 캐릭터는 십수 년에 걸쳐 지루하게 서서히 성장하다가 재미없게 사라지곤 했다. 혹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캐릭터들처럼 갑자기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진화한 뒤 “니들이 열광하던 에바는 끝났어. 이젠 현실을 직시해”라며 완벽한 작별 인사를 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슬램덩크›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갑자기 ‹슬램덩크›를 닫아버렸다. 속편을 향한 모두의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재니까”라는 대사와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 강백호도, 서태웅도, 송태섭도, 더는 성장하지 않았다. 어른이 될 길목에서 그들의 청춘은 멈췄다. 바로 그 덕분에 그들은 여전히 늙은이들의 우상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아재와 줌마들은 캐릭터의 새로운 성장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 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슬램덩크›의 속편이 아닌 것이 정말이지 기쁘다. 그들은 그 시절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성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성장하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물불 가릴 줄 모르는 멍청하고 대범한 청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살아보니 우리는 천재가 아니었다. 강백호도 어쩌면 천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혹은, 결국 부상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동네에서 운동화 대리점을 경영하는 검은 머리의 덩치 크고 성격 좋은 아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맙소사, 우리에게 그따위 미래는 필요 없다. 우리의 미래는 이따위가 됐지만, 강백호와 송태섭의 미래는 그따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더 라스트 슬램덩크›는 절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누군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에게 내 간절한 메시지를 꼭 전달해주길 부탁드린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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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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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작가가 이번에 보내온 에세이 주제는 바로 축구입니다. 이번 2023 카타르 월드컵에서 펼쳐진 명장면에 대한 찬사일까요. 아쉽게도 땡! 대한민국에서 조심해야 할 대화 주제인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입니다. 벌써부터 진저리가 난다고요? 잠시만 진정하고 숨을 고르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글에 살짝 발을 담가 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빨려들 듯 읽다 보면 나중에 자발적인 사람 찾기를 시작할지도 몰라요. 그게 누구냐고요?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시죠!

이 글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그러니 평소 예비역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에 진력난 분이라면 지금 빠져나와도 좋다. 누구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따위를 듣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 페이지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분이라면 안심하셔도 좋다. 이 글은 축구를 정말이지 증오한 남자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예비역들이 전역 후 첫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아니, 요즘도 전역 후 후배들과 술자리를 하는 예비역 선배라는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건 나도 나이 든 엑스세대라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이름은 주광문이었다. 나는 1996년에 남들보다 일 년 정도 늦게 군대에 갔다. 당시 대학생은 2학년을 마치면 군대에 가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나는 그들과 맞춰 가지 못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너 같은 애는 훈련소에서 죽는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1년 정도 수영장을 다녔다. 하지만 습득 속도가 늦어서 수영보다는 수다에 집중하는 어머니뻘 선생님들과 항상 같은 클래스에 머물렀다. “좋은 데로 못 빠지면 운전병이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몇 번이나 떨어진 코스 주행 테스트에서도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군대에 가서 정말로 필요한 건 수영도, 운전면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건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공부하고 군대에 갔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사람 때문이었다. 주광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튀어나오는 주광문이라는 이름은 누구냐. 나의 군대 선임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미리 드린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듣느라 여기까지 참은 것도 모자라서 당신은 내 군대 선임의 이름까지 알게 됐다. 인터넷에는 참 알 필요 없는 헛된 정보가 많다.

한국 군대의 현실을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중 행정병의 모습

나는 행정병이었다. 지원과라는 곳에서 일했다. 뭐든 지원하기 위한 서류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내가 담당한 서류들은 대개 ‘군사보안’이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군대에서 절대 유출되면 안 되는 것이 군사비밀이다. 3급 비밀은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비밀이다. 2급 비밀은 국가 안전 보장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비밀이다. 1급 비밀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비밀이다. 내가 다루었던 비밀 서류 중 국가 안전 보장에 손톱만큼도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주광문이 있었다. 그는 지원과 선임이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살 반 근육 반으로 만들어진 군사 기계였다. 군사 기계가 왜 행정병이 근무하는 지원과에 있는가? 행정병은 나 같은 최약체 남자가 후방에서 서류 작업이나 하라고 생긴 보직이다. 군사 기계로 태어난 사람은 해병대나 전방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왜 주광문은 행정반에 있을까? 다른 선임들 말을 들어보니 지나치게 오랫동안 인력이 공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는 아예 지원과가 굴러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일단 누구라도 신병이 들어오면 행정병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그게 주광문이었다. 컴퓨터 자판에 손가락 한 번 올려본 적 없는 군사 기계.

군사 기계는 나를 내심 좋아했다. 잘 굴려 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 대충 눈치 빠른 듯한 졸개가 하나 생겼으니까 싫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군사 기계는 츤데레였다. 매우 육체적으로 강력한 츤데레였다. 친근함을 주먹으로 풀었다. 본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대화를 하다가 재미가 있으면 주먹으로 내 어깨를 쳤다. 재미있어도, 재미없어도 주먹으로 쳤다. 풀 스윙으로 쳤다. 나는 경쾌하게 날아갔다. 아니다. 나는 지금 군대 내부의 폭력성을 고발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1996년이었다. 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일상화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츤데레는 참을 수 있었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군사 기계는 심지어 축구 기계였다. 그는 축구를 좋아했다. 사랑했다. 무엇보다도 토요일 정오의 평온함을 즐기려는 후임들을 깨워서 자외선이 위험 농도로 작렬하는 연병장에 불러모아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시키는 행위 자체를 사랑했다. 군대 축구에는 규칙이 없다. 옐로카드도 없다. 레드카드도 없다. 그래서 그걸 군대에서는 ‘전투 축구’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축구 학살’이라고 부르겠다.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군대 축구를 지칭하는 군대스리가 밈, 명칭의 유래는 독일의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와 군대의 합성어이다.

주광문은 나를 몇 번 경기에 집어넣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스탠드에 앉아 책을 보는 척하며 축구하는 남자아이들을 지켜보던 사람이다. 심지어 나는 한국을 완전히 들었다 놨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도 보지 않았다. 내 기억에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에 월드컵 붐을 일으킨 첫 번째 행사였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이후 32년 만에 동아시아 1위로 본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발전한 기술 덕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중계를 볼 수 있던 월드컵이기도 했다. 당연히 모든 국민이 잠을 설치고 월드컵을 지켜봤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신났다. 장벽은 거대했다. 하필 16강을 두고 붙어야 하는 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아르헨티나와 전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좀 해볼 만한 상대였다. 아니다. 역시 만만찮았다.

마라도나는 정말이지 위대했다. 그는 거의 혼자서 필드를 질주하며 한국을 3:1로 짓밟았다. 그럼에도 감격스러운 경기였다. 대표팀 주장 박창선이 넣은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골로 기록됐다. 다음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한국은 1:1로 비겼다. 김종부가 넣은 동점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 1점으로 기록됐다. 다음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누구도 한국에게 돈을 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은 기억할 만한 경기를 펼치며 3:2로 아깝게 졌다. 최순호와 허정무의 골이 들어가던 순간 한국 아래 지각판이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아니 잠깐, 멕시코 월드컵을 보지도 않았다면서 경기 내용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다 새로 공부한 것이다. 글쟁이가 쓰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라고 믿지는 마시라.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디에고 마라도나와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

다시, 주광문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현실에서 축구를 한다고 연병장으로 밀어내는 주광문이 있었다. 나는 몇 주를 뛰었다. 의미 없이 뛰었다. 공은 거의 내 근처에 오지 않았다. 공이 내 근처에 오면 내 발은 공을 찼다. 차기는 했다. 공은 항상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누구도 나에게 공을 패스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임병은 뛰어야 한다. 뛰는 모습을 선임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가장 크나큰 죄악은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짝다리를 짚고 쉬는 것이다.

주광문은 아예 클래스를 만들었다. 5시간 넘게 진행된 축구가 끝나고 나서도 한 시간 더 진행되는 클래스였다. 강사는 주광문, 학생은 김도훈. 둘만의 클래스였다. 그는 일부러 공을 뻥뻥 연병장 한가운데로 찼다. 그럼 나는 짧은 다리로 공을 찾아오기 위해 뛰었다. 찾아온 공은 다시 연병장으로 날아갔다. 그게 수십 번 반복됐다. 주광문은 “너는 체력이 문제야. 체력이”라고 외쳤다. 나는 이 문단을 쓰면서 약간의 PTSD를 느끼고 있다. PTSD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행히 주광문의 축구 교실은 두어 달 뒤 멈췄다. 포기한 것이다. 그는 나 같은 놈은 축구 따위 하지 말고 물 주전자에 차가운 물 떠 놓고 선수들 응원이나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정답이었다. 사실 내가 가장 되고 싶었던 건 언제나 치어리더였다. 말이 나온 김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중 하나는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가 치어리더로 나오는 영화 〈브링 잇 온Bring It On〉이다. 이 영화가 나온 게 2000년이다. 그해 태어난 사람들도 벌써 22살이다.

치어리더 영화 ‹Bring it on›, 2000, 포스터

나는 얼른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토록 싫어했던 축구를 좋아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도대체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이 글 어디에 나오냐고? 지금 할 생각이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를 좋아하게 됐다. 나는 월드컵이 열리기 한 달 전 사귀던 사람에게 차였다. INFP답게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을 수백 번 반복해 들어도 도무지 슬픔(과 차인 것에 대한 자학)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내일 월드컵 보러 가자. 사직 구장에서 중계해 준단다.” 내가 축구만큼 견딜 수 없던 것이 붉은 악마 티셔츠였다. 붉은 악마 구호였다. 그런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나는 울고 있었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태극기 문양을 붙이고 친구와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전 연장 후반에 골든골을 넣는 순간이었다. 축구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월드컵은 위대한 것이었다. 이별(이 아니라 차인) 슬픔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휘발됐다. 나는 밤새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러니 이 글은 결국 축구에 PTSD를 가진 남자가 어떻게 실패한 연애를 월드컵으로 극복하고 축구를 사랑하게 됐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 이 글을 쓴 목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주광문을 찾고 있다. 진심으로 찾고 있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 그냥 별의별 사람이 다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온 1977년생 주광문을 아는 분은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 쓰고 보니 이 자식은 나보다 나이도 어렸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 악마 모습, 사진 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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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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