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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시스템, 부유하는 이미지

Writer: 오연진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오연진 작가는 암실에서 아날로그 프린팅 기법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테크닉과 상상력, 그리고 명징한 콘셉트가 만나 탄생하는 그의 작업은 유동적이고 진동하는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주5일 9 to 6로 일하는 회사원이자 작가, 여성 시각 예술인 네트워크 운영자 등 여러 가지 일을 무리 없이 이끄는 에너제틱한 인물이기도 하답니다. 사회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스스로 여성 창작자의 비극적 생애를 종결하는 해피엔딩의 예가 되길 바라는 오연진 작가의 심도 있는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미술가로 활동하는 오연진입니다. 사진, 회화, 인쇄물 등 평면 매체를 주로 다루며 이미지에서 보이는 것 이면의 구조나 관계성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주로 암실에서 아날로그 프린팅 기법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여성 시각 예술인 네트워크 ‘루이즈 더 우먼’의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시스템 기반의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대 초반의 제게 예술은 개인의 자율성을 가장 존중하는 분야로 느껴졌기 때문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후 조형예술 대학원에 진학했고, 재학 중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두산아트랩» 전시 전경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서울 창신동 언덕길에 위치한 작업실을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쓰고 있어요. 2019년 초부터 대형 롤지 컬러 인화를 위해 직접 충무로에서 암실 장비를 구입하고 세팅했어요. 암실 작업의 특성상 항상 불을 완전히 끄고 작업해야 하는 점이 힘든 부분입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르게 해보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다음 작업을 구상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역시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뭐가 되든 일단 계속해서 만듭니다. 항상 출품작 수의 3~5배수 정도를 작업하는데요. 가령 작품 10여 점 제작을 목표로 할 경우 100여 점 가까이 만들고 그중 일부만 선택합니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작업이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해요. 방향이 바뀌는 가능성을 기꺼이 열어두는 편입니다.

«Summer Love 2022», ‹페이스트리Pastry #18›, 2022

«Summer Love 2022», ‹페이스트리Pastry #19›, 2022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주시겠어요?

‹페이스트리Pastry›(2022) 시리즈는 이미지를 만드는 아날로그 프로세스에 개입하여 여러 층의 빛과 물질의 레이어를 중첩한 작업입니다. 노광, 현상, 노광, 현상을 반복하며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 효과가 나타나요. 특히 물결치듯 흐르는 형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현상 용액이 인화지에 흐르며 생긴 자국이에요. 용액의 고임 정도, 맺힘 정도에 따라 빛이 투과되는 정도가 달라져요. 저는 이 용액 자체가 네거티브 필름이라고 생각해요. 전통적인 프로세스에서 네거티브 필름은 상을 고정한 상태에서 동일한 사본을 끝없이 파생하는 원본 역할을 하지만, 제가 만드는 이미지에서 네거티브 필름은 끝없이 움직이며 원본이 되는 조건 자체가 흔들리는 세계입니다. 

‘조건이 움직이는 세계’는 물이 든 수조를 인화지 위에 올려두고 밀착 인화한 ‹필름무빙Film Moving›(2020), 비누막(Soap Film)이 일시적으로 맺힌 상태를 찍은 ‹라멜라Lamella›(2020) 시리즈에서도 표현한 바 있어요. 물리적인 레이어가 아닌 역사적 레퍼런스를 네거티브 삼아 차용하여, 마야 데렌Maya Deren의 흑백 단편 댄스필름 ‹밤의 눈›에 등장하는 무용수의 그림자를 투영해 찍어낸 ‹아노토스코프Anorthoscope›(2020) 연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노토스코프›는 반투명한 재질의 캔버스 위에 무용수의 그림자를 출력하고, 그 위에 물감을 올린 후 캔버스를 다시 인화지 위에 밀착 인화해서 만든 시리즈예요. ‘움직임을 움직이는’ 마야 데렌의 시도를 저의 평면에 투사해서 내러티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작년에 연 개인전 «기억의 조차(The Tides of Memory)»(2021,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선보인 ‹오버올Over All›(2021) 시리즈는 반투명 필름지에 유화로 드로잉하고 이를 다시 필름 삼아 사진으로 제작한 시리즈입니다. 전시장에는 드로잉과 드로잉에서 파생된 사진을 병치했고, 드로잉의 색과 명암이 뒤집혀 드로잉의 일부를 확대 인화한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관객이 하나의 이미지를 볼 때 보이지 않는 관계로 엮인 전후의 관계성을 포착하길 바랐죠.

«밤의눈», ‹anorthoscope #2-3›, 2021, Print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이미지 너머의 구조와 관계성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시스템을 보길 바라요. 제가 만드는 시스템은 거스를 수 없는 고정된 체계가 아닌, 흐르는 현상 용액이 네거티브 필름이 되는 것처럼 유동적이고 진동할 수 있는 조건 체계입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대부분 만족합니다. 제작비를 더 들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주 5일, 9 to 6로 일하는 회사원입니다. 웹 에이전시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퇴근 후 작업실에 가거나, 루이즈 더 우먼 관련 일을 하거나, 다른 부업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쉽니다. 주말의 경우, 전시를 앞두고 있을 때는 작업실에 가고, 아니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합니다.

«Tweed», ‹Solar Vein›, 2022

«Tweed», ‹Versatile Meadow›, 2022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디스위켄드룸에서 개인전 «트위드Tweed»를 선보이고 있는데요. 이번 개인전에서는 동시대 무빙 이미지에 대한 추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아요. 여기서 말하는 무빙 이미지란, 흔히 생각하는 비디오나 영화는 아니고요. 자신이 선택하고 재생한 데이터를 반영해 실시간으로 새로고침되는 유튜브 홈피드나, 특정 상품을 검색하자마자 메인에 관련 상품을 추천하며 진열해버리는 이커머스 플랫폼의 인터페이스, 태그나 수치를 입력하면 자동 생성되는 AI 이미지 등 알고리즘으로 특정 조건을 반영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입니다. 불안정하고 가변적이죠. ‘내가 만들고 있는 게 이런 동시다발적으로 유동하는 이미지에 대한 추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앞서 언급했지만, 이미지를 둘러싼 조건을 조율해 동일한 리소스를 가지고도 여러 조건으로 변주, 확장하는 실험을 반복했는데요. 결국 제가 보여주려고 하는 건 이미지를 조건 알고리즘으로 무한 변주, 파생시키는 구조와 그 안에서 형용 모순적 형태로 진동하는 비고정적 이미지, 그에 대한 추상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Self referential Film #14›, 2022

‹Self referential Film #17›, 2022

‹Self referential Film #16›, 2022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관심사가 다양하고 에너지가 많아요. 덕분에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역할 수행을 하게 되고, 상황에 따라 태도나 행동 패턴이 달라지기도 하죠. 특히 커뮤니티 운영을 하면서 생각이나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조직 문화나 여성 중심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며 인간관계와 관계를 통한 성장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상호작용과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크고, 사람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또 한편으론 경계하기도 하죠. 연대는 불신이 기반이 된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사람을 믿고 또 믿는 일이에요. 그래서 특수한 개개인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우지 않는 시스템 기반의 문제 해결 과정과 방식을 좋아합니다. 커뮤니티 운영을 하기 전에도 구조적인 사고를 좋아했어요. 말의 내용보다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입장을 뒷받침하는지 분석하는 게 좋았죠. 소설보다 비문학이 좋고, 내용 자체보다 내용을 구축한 체계를 보는 게 좋았어요. 지금 웹 기획을 하면서 서비스 구조를 만드는 일이 재미있답니다. 케이스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인터페이스를 기획하는 일인데 저한테 잘 맞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지 이면에 구조가 있다고 전제하는데, 제 작업도 그렇거든요. 보이지 않는 구조를 가설하고 관계성을 만들어요.

«정착세계», ‹페이스트리Pastry detail #1›, 2022

«정착세계», ‹페이스트리Pastry detail #2›, 2022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장기간 침체하거나, 우울한 기분에 빠지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요. 자기 증명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구조적, 환경적 변수로 한계나 어려움에 직면할 때 순간적으로 큰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러고는 복수를 다짐하거나…가까운 동료나 친구,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햇빛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 가서 뒹굴뒹굴 시간 보내고, 다시 분노하고, 복수를 다짐하고…아무리 예상치 못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성과를 만드는 루틴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해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웹 기획 쪽 커리어로 뒤늦게 진입했기 때문에 이 업계에서 어떻게 전문성을 키우고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N잡러, 부캐의 시대라고 하지만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잠깐 하다가 말겠지?’, ‘본업(?) 따로 두고 취미로 하는 거겠지?’, ‘시킨 일 안 하고 딴짓하는 거 아니야?’ 등의 의심을 받기 쉽거든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열정과 진정성을 어필해야만 하는 피로감을 느낍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일을 돌려가며 할 때 활력이 생기고 생산성이 높아지는 사람이라서 회사 생활을 하는 게 좋아요. 물론 전시 스케줄이 겹칠 때는 워라밸이 너무 깨지기 때문에 지금이 완벽한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연봉을 올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Lace», ‹Solar Breath #0356›, 2019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미술 전공자로서 늘 ‘탁월함’을 목적에 둔 교육을 받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미술은 좀 못생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대부분 그 또한 작가가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작업의 퀄리티 여부를 평가하기 전에 작가의 성장을 전제로 확장가능성을 살펴주고,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주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창작물 혹은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적절한 절차와 규범을 지키지 못한 예술은 문제가 됩니다.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되어 콘텐츠를 제작하는 시대에 순수예술이 사회적 규범과 가치, 윤리로부터 독점적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안이하다고 생각해요. 예술, 창작자, 예술계 종사자, 예술계 내의 윤리적 규범에 대한 논의가 제도적 사유와 실천으로 심화하지 못하고 관념적인 담론에 그치는 현상 또한 안타깝고요. 창작물 또는 창작물을 구현하는 절차와 과정이 자기가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자기가 재현한 이미지가 어떤 시각문화를 뒷받침하는지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주시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너무 큰 의미부여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추구하는 가치는 자신이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주변 인간관계와 경험의 폭 안에서 결정됩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자신의 기질과 강점을 파악해 그에 맞는 삶을 개척해 나가세요.

«Lace», ‹Solar Breath #0419›, 2019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제 작업과 루이즈 더 우먼 활동에 관련한 자료가 체계적으로 아카이빙되면 좋겠어요. 실질적인 데이터가 남아 있어야 기록이든, 해석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작업의 가치가 장기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창작자로서 영광스러운 일이고, 여성 창작자로서 여성 예술인의 권리 신장에 목소리를 냈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기록되길 바랍니다. 페미니스트 여성 예술가들이 사회의 전통적 기준에 반기를 들다가 고립되고, 생계가 끊기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불행하게 살다 죽거나 사라지는 서사를 너무 많이 보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주적인 여성의 비극적 생애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요. 이는 아주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성 생애의 비극적 신화를 종결시키고자 페미니스트로, 예술가로 살면서 부유하고 명예롭고 평탄하게 세속적 가치를 누리며 무병장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성별, 인종, 계급, 외모, 장애 유무 등의 이유로 모든 사람이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고, 착취와 폭력에 노출되지 않고, 죽거나 다치지 않는 미래입니다.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사고로 죽고, 사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해 스토커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일,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란의 젊은 여성들이 살해되고, 인터넷이 차단되고, 교육받지 못하는 일이 아직도 벌어진다는 게 너무 기가 막히죠. 인간 사회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기억의조차», ‹Solitaire #2›, 2021

Artist

오연진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매개 변수를 조건화하고 이를 변주해 새로운 환영을 만든다. 개인전 «트위드»(2022, 디스위켄드룸), «기억의 조차»(2021, 송은 아트스페이스), «The Very Eye of Night»(2020, 송은 아트큐브), «Lace»(2019, 전시공간)을 열었고, «정착세계»(202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써머 러브»(2022, 송은), «생동하는 틈»(2022, 원앤제이갤러리), «두산아트랩»(2021, 두산갤러리), «리브 포에버»(2019, 하이트컬렉션), «서울사진축제 특별전: Walking. Jumping. Speaking. Writing.»(2018, SeMA창고)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yeonjin-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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