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Visual Portfolio

남 눈치만 보면 죽도 밥도 안 돼요

Writer: 권도희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권도희 작가는 독립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이 순간을 ‘마법 같다’고 말해요. 인하우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듣고 그린 그림을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해당 밴드가 포스터를 의뢰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거든요. 원래 가려던 길을 돌아 돌아 다시 찾은 거로 생각할 정도랍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와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창작을 지속하는 힘이라고 믿거든요. 더불어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하기 위해 삶의 균형을 중시해요. 마라톤 같은 창작 생활을 꿈꾸는 권도희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 권도희입니다. 앨범 자켓과 포스터 작업을 주로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인쇄 작품도 만들고 있습니다. 한 가지 개념과 작업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고 매일 진화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어머니께서 일찍 알아봐 주신 거죠. 그렇게 대학 입학 전까지도 학원에 다녔는데요. 어느 순간 경쟁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됐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교에서 디자인 전공을 마치고 광고대행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고요. 당시에는 제가 원했던 일이 이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새도 없이 바쁘게 일했습니다. 그렇게 총 5년 넘게 여러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아이패드를 처음으로 구입해서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인스타그램에 그림 계정을 따로 만들어 작업을 올렸어요. 한번은 제가 좋아하는 밴드 ‘크루앙빈Khruangbin’의 노래를 들으며 비행기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밴드의 베이시스트가 발견하고 포스터 작업을 의뢰해온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짜릿하고 소름이 돋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죠. 이를 계기로 서서히 다른 뮤지션에게도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커미션을 받기 시작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했어요. 좋아서 그리는 그림을 하니 원래 가려던 길로 들어선 기분이에요. (웃음)

‹Khruangbin›, 2022

‹home›, 2021

‹Weird Dream›, 2021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침실 맞은편 방을 스튜디오로 쓰고 있어요. 디지털 작업을 위한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놓아둔 책상과 스크린 프린팅이나 페인팅처럼 좀 더 자유로운 작업을 하는 큰 테이블을 마주 보게 배치했어요. 이 공간은 저의 작업실이면서, 하루를 여는 아침 루틴과 하루를 마감하는 밤 루틴을 마치는 상당히 사적인 공간이기도 해요. 저와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죠. 현재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의식적으로 더 가꾸고 소중히 하려 합니다. 이번 새해에는 풍수지리에 맞춰 방 구조도 바꾸고, 제 마음에 들게 더 꾸며봤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저는 호기심이 많고 쉽게 흥미를 느끼는 편이라,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아요. 작업 스타일이 일정하지 않은 이유랍니다. 예전에는 아이코닉한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서 작업에 담는 의미나 스타일에 통일감을 가지려고 집착했는데요. 이제는 저의 색깔이 묻어나면서 변화무쌍한 작업을 만드는 게 나다운 것이라고 받아들였어요. 그럼에도 제가 애정하고 동경하며 꾸준히 영감을 받는 대상이라면 강렬한 색을 사용한 오래된 바이닐 커버, 포스터, 책 표지예요. 제가 사는 태국은 한국에 비해 오래된 물건을 더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시장에 가면 오래된 인쇄물을 찾아다니곤 해요. 모아두고 보기만 해도 항상 즐거움을 주거든요.

‹1.5°C Magazine›, 2021

‹So Journers›, 2020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크고 작은 모든 경험을 영감으로 축적해둬요. 이러한 경험들은 작업할 때의 순간과 합쳐져 찰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파밧!’하고 만들어내죠. 아이디어를 대지에 옮기기 위해 스케치로 구도를 잡고, 부분부분 즉흥적으로 그림을 완성해요. 스케치를 여러 개 만들기보단,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편입니다.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주시겠어요?

먼저 2023년 달주기 달력을 소개하고 싶어요. 우리는 현대 달력의 날짜가 가리키는 시간에만 익숙하죠. 그런데 날짜보다 더 크고 오래된 개념이, 바로 달의 주기예요. 태양과 달,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의 움직임으로 매일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주기적인 달의 형상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달의 주기를 의식함으로써 우주의 기운과 연결되고, 시간 속에서 안정과 균형을 찾는 리추얼은 제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데요. 올해는 이 달력을 벽에 붙여놓고 흐름을 보고 싶어서 작업하게 되었어요.

‹The Women’s Collective› 카드 게임도 즐겁게 작업했어요. 카드에는 여성 건강과 관련된 일곱 가지 테마 아래 총 67개의 질문이 적혀있는데요. 여성 건강에 대한 인식 수준을 끌어올리고, 여성을 둘러싼 부정적인 ‘성(性)’ 이미지를 타파하고 싶었어요. 게임을 통해 금기시되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한 분위기에서 소통하도록 만들었죠. 테마별 일러스트레이션을 포함해 전체 디자인을 총괄했는데, 제작 의도가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고 질문들이 재밌어서 작업도 막힘없이 술술 풀렸던 기억이 나요.

‹The Women’s Collective›, 2022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최근 에버프레스Everpress의 연말 결산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진행했어요. 에버프레스의 작업은 2년 연속 맡았는데, 이번 2022년은 12월 마지막 주 휴일 시즌에 의뢰받아 정말 타이트하게 작업했어요. 개인적으로 이동할 일이 많아 공항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작업했습니다.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공유할 새도 없이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 했죠.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도 갈팡질팡하며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무사히 일정도 잘 맞추고 좋은 피드백을 얻은 것은 다행이지만, 시간에 쫓기듯 작업을 끝내면 항상 딱 꼬집을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요.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예전에는 주로 밤에 작업을 하면서 밤낮이 바뀐 생활을 오래 했어요. 제가 원래 게으른 편이라 계획 없이 하루를 시작하면 얼레벌레 시간을 보내고, 다시 늦은 밤에 부랴부랴 몰아서 일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 루틴(스트레칭, 호흡, 명상)을 마무리하고 작업을 시작해, 정해진 시간이면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해요. 작업이 끝나면 같은 시간에 밤 루틴(호흡, 명상, 일기 쓰기)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매주 같은 요일에 요가 클래스를 가거나 모닝 러닝을 할 때도 있어요. 처음에는 업무 효율을 늘리려고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제 삶 속에 튼튼한 뼈대를 지어나가는 성취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규칙적인 생활을 더 오래, 더 잘 유지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평일을 규칙적으로 보내는 만큼, 주말이나 휴일에는 늦잠도 자고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요. 이러한 대비가 만드는 균형이 제 삶을 건강하게 지속하게 만든다고 믿어요.

‹Endless Era›, 2022

‹Three of a kind›, 2022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크게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요. 첫 번째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에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마구 해내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겠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면서 손목, 목 어깨, 허리가 예전보다 안 좋아져서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가도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니까 정신이 맑아지고, 감정 기복이 줄어든 것 같아서 좋아요.

또 다른 관심사는 오토바이에요. 전에 살았던 태국 치앙다오에서는 바이크를 타고 다녔는데, 여기 방콕에서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어요. 그러다 얼마 전 마음에 드는 중고 바이크를 발견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태국은 오토바이의 나라답게 중고 바이크를 사고팔면서 커스텀하는 문화가 널리 자리 잡고 있는데요. 최근 구입한 바이크를 취향껏 바꿔나갈 생각에 핀터레스트 보드에 아이디어를 마구 추가하면서 한창 들떠있는 상태에요. (웃음)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유연하지만 뼈가 있는 삶을 추구해요. 잘 잡힌 중심을 축으로 삼아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요. 작업할 때도 한 곳에 무게 중심을 싣고, 나머지 부분은 좀 더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요소를 배치합니다.

‹333(Typo Janchi)›, 2021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처음엔 우울한 감정에 도취하곤 해요. 하지만 그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려 노력해요. 정말 모든 일이 잘 안 풀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하루에 약속 하나만 꼭 지키는 걸 목표로 해요. 예를 들면 ‘요가 20분 하기’처럼요. ‘오늘 이거라도 했다’고 제 자신에게 칭찬거리를 만들어줘요. 결국 저를 가장 잘 다독일 수 있는 사람도, 가장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도 제 자신이더라고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언어의 장벽입니다. 태국에서 인쇄를 의뢰하거나, 스튜디오에 필요한 장비를 구축하려니 쉽지 않더라고요. 영어, 번역기, 그리고 3년 동안 다져진 어설픈 태국어로는 제가 원하는 100%를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번 달부터 태국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매일 3시간씩 듣는 수업과 일을 병행하는 게 쉽진 않지만, 배우는 재미가 쏠쏠해서 즐겁게 다니고 있어요.

‹Dear Me›, 2021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용기와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창작에는 좋고 나쁨이나 수준이 높고 낮음은 없고 선호도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나쁜 작업은 아니잖아요. 펜 혹은 붓을 들 용기, 세상에 내어놓을 용기, 그리고 창작물에 목소리를 담아내는 자신감 등이 창작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믿습니다. 저 역시도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던 시절이 있었어요. 취미 삼아 그린 그림들을 올리던 인스타그램에 점점 팔로워가 늘어가면서 부담감이 늘어난 거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작품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고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곤 했어요. 운이 좋게도 그때 깨달았죠. ‘남 눈치를 보면 죽도 밥도 내 예술로 안 되는구나!’라는 걸요. 여전히 가끔은 ‘이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지만, 조금 더 제 직관과 첫 아이디어를 믿고 밀어붙이려 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주시겠어요?

저 역시도 지속하는 방법을 꾸준히 찾는 중인데요. 너무 심하게 불타오르지 않으면서 ‘적당히’ 좋아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불타오르다 재가 되면 안 되니까요. 인생의 다른 부분과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먼 거리를 가기 위해 페이스 조절이 필수인 마라톤 경기처럼요.

‹Mdou Moctar›, 2021

‹VF Korea›, 2022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저는 개인 작업에서 주로 치유와 관련된 의미를 담곤 하는데요. 그 내용들은 제가 배우고 깊이 동조하는 대상이에요. 저의 작업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깨달은 내용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담겨 있답니다. 많은 분이 제 작업에서 좋은 메시지 혹은 치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요.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저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미래에도 여전히 꾸준하게 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길은 어릴 때부터 오고 싶었던 길이고, 방향을 잃었다가 마법 같은 기회로 다시 찾아온 길이에요. 흥미를 잃지 않고, 지치지 않게 오래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처럼 디지털 작업뿐 아니라 창의성이 필요한 일이면 뭐든지 두루두루 하면서요.

Artist

권도희는 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좋아하는 밴드의 포스터를 만들면서 일러스트레이터 커리어를 시작한 덕에 앨범 아트, 바이닐 커버 디자인과 포스터 등 음악과 관련한 작업을 주로 한다. 스스로의 치유 과정을 개인 작업으로 풀어내고 실크스크린 인쇄와 리소 인쇄를 통해 인쇄물을 만든다.

결과(4)

Thank You for Subscription!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애티튜드»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1분, 창작자의 반짝이는 감각과 안목을 담은 소식을 메일함에 넣어드립니다.

결과(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