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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뮤지션 장기하가 웅얼거리는 서체

Writer: 채희준
장기하, 공중부양, 부럽지가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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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한 사람을 대변하는 서체를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한글 서체 디자이너로 활발히 활동 중인 채희준 작가가 최근 뮤지션 장기하와 협업해 ‘기하’를 만들었습니다. 장기하 특유의 자연스럽고 독특한 느낌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에 주목해보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체 디자이너 채희준입니다. ‘청월’, ‘청조’, ‘초설’, ‘고요’, ‘신세계’, ‘탈’, ‘고요 라운드’, ‘클래식’, ‘기하’ 등의 서체를 작업했습니다.

뮤지션 장기하 님과 협업한 폰트 ‘기하’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요.

‘기하’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을 소재로 운율을 만드는 기하 님의 음악 철학을 서체로 담아낸 결과예요. 기하 님 특유의 억양이 느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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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디자인 © 김영나, 사진 제공 ©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장기하다움’을 어떻게 정의하고, 폰트에 반영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보고 싶어요.

작업을 시작한 시점은 데모곡이 나오기 전이라서, 우선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진행했습니다. 곡의 개별적인 느낌보다는 뮤지션 장기하를 관통하는 정체성은 무엇이고, 이를 글자에 담아내는 게 가능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특히 어떤 방법으로 장기하 특유의 운율을 적합하게 반영할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죠. 이를테면 글자의 너비를 음절마다 다르게 설정해서 리듬감을 줄 수도 있고, 획의 대비를 크게 주며 그로부터 운율을 느끼게 할 수도 있고, 획을 다양하게 분절해서 운율을 느끼게 할 수도 있거든요. 공중부양 앨범 데모에 속한 노래 다섯 곡을 듣게 되었는데, 담백하게 정제된 뮤지션 장기하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몇 차례 미팅을 갖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기하 님은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창작자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가치관을 글자에 대입한다면, 뼈대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운율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형태나 장식을 넣지 않고, 글자의 뼈대만으로도 특유의 억양을 느낄 수 있는 서체 말이죠. 이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가치관은 제가 서체를 제작할 때 추구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창작자로서 가치관이 일치했던 것 같아요.

뮤지션 한 명의 정체성을 담은 한글 폰트는 처음 보는 듯해요. 작업 과정은 어땠는지,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채희준 폰트샵’ 판매 페이지에 쓰인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한 터라 진행하는 데 막힘이 없는 느낌인데요. 실제로는 수정사항도 있었고, 다양한 피드백을 주고받았답니다. 예를 들면 ‘ㅁ’의 경우, 너무 과하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아래의 형태로 수정했어요. 글자를 의인화해서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요. “글자에 나이가 있다면, 몇 살일까요?”처럼요. 기하 님은 “30살 정도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셨죠. 저는 기하 님이 지닌 추상적인 느낌을 구체적인 형태로 이끌어내야 하는 입장이라서, 다양한 설문을 통해 적절한 힌트를 포착하는 게 중요했어요. 매체에서 기하 님을 접한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가벼운 질문에도 상당히 고민하고 디테일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이를테면 “이 글자를 귀여움 vs. 멋짐으로 나눈다면 어디에 가까울까요?”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시더니 이렇게 답하시더군요. “귀여움 30%, 멋짐 70%…블렌딩이요!” (웃음)

채희준, 서체, 타이포그래피, chaeheejoon
장기하, 채희준, 서체, 타이포그래피, chaeheejoon, typography

앨범 디자인 © 김영나, 인물 사진 © 민현우, 사진 제공 ©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말하듯 노래하는 기하 님과 서정적인 감정을 담는 희준 님이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하’에서 희준 님과 닮은 구석이 있을까요?

저는 특정 속성이 과하게 드러나는 형태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기하’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획이 급격하고 빠른 속도를 갖고 있었다면 지금과 다른 형태가 나왔을 텐데, 이는 기하 님과 닮지 않은 모습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글자를 완성하고 기하 님이 이렇게 평하시더라고요. “이 서체는 제가 생각하는 감각의 균형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나 장난스러울 것인지, 얼마나 진지할 것인지, 이런 고민에 대해서 각자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본인이 생각하는 적당한 균형을 가진 결과물이 나왔다고 하셨어요. 저와 기하 님 모두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감각을 추구하기 때문에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번 ‘기하’는 희준 님이 협업을 통해 완성한 첫 번째 폰트입니다. 특별한 시도를 한 이유가 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창작자로서 세계관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해당 인물과 협업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형태를 창작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죠. 두 번째 이유로는 서체 산업이 가지고 있는 기존 패러다임과 다른 형태로 작업하고 싶었어요. 저렴한 비용으로 전용 서체를 의뢰하고, 그 서체가 무료로 배포되는 상황이 폰트 산업의 측면에서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서체를 순수하게 창작하는 행위에 흥미를 느껴요. 전용 서체를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하는 시장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창작자로서 자유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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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공유해주세요.

장기하와 어딘가 닮아있다, 장기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평이 기억에 남네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의도했던 반응을 접해서 기분이 좋았답니다.

계획 중인 다른 프로젝트가 궁금해요.

원래 ‘기하’보다 먼저 진행하던 협업 프로젝트가 있었는데요. 이런저런 이유로 멈춘 상태예요. 그래서 당분간 개인 작업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현재 레귤러Regular만 출시한 ‘신세계’의 영문과 숫자 디자인을 리뉴얼하고, 세 가지 웨이트를 추가해서 패밀리로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작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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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신세계’ 패밀리 © 채희준

희준 님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이나 태도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겠어요?

창작자는 보통 작업실을 얻거나 카페에 가서 작업을 즐기는 편인데요. 저는 집에서 작업하는 게 가장 집중력이 높더라고요. 이유를 생각해 보니, 작업을 ‘일’의 영역으로 분류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주어진 보상을 위해서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노동하는 게 ‘일’이라고 보는데요. 제게 있어 작업은 그냥 책을 읽거나 TV를 시청하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행위에 가까워요.

창작자로서의 삶의 태도와 가치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날까요?

클라이언트 잡보다 직접 생산한 서체가 더 많다는 사실이 저의 어떤 태도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독립적으로 폰트를 생산하는 행위가 정말 직업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017년 ‘청조’를 작업할 때는 회사에 다니지 않았고,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았죠. 이전까지는 최소한 아르바이트까지는 계속 병행했거든요. 여담이지만 ‘청월’과 ‘청조’는 작업 당시의 상황과 감정에서 이름이 유래했어요. ‘청월’을 만들 때는 회사에 다니며 밤에 작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달이나 밤의 공기를 떠올리며 이름을 지었죠. ‘청조’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오로지 글자 작업에만 전념했을 때 만든 서체였습니다. 지금껏 저는 글자를 만드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고, 치열하게 제작한 폰트를 통해 온전히 수익을 내보고 싶은 도전 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저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직업군과 비교해 차이가 없을 정도로 수익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아무런 지원 없이도 온전하게 서체 판매 수익을 통해 한글 폰트 디자이너가 자생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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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디자인 © 김영나, 인물 사진 © 민현우, 사진 제공 ©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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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디자인 © 김영나, 사진 제공 ©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

‘기하’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다만 개인 작업을 하던 호흡보다 조금 빠르게 흘러가는 점이 조금 어려웠죠. 기하 님의 앨범 릴리즈 날짜가 확정되고, 그 시기에 맞춰 출시하고 싶었기 때문에 빠르게 작업하게 되었거든요. 마감 개념이 없고 자유롭게 제 호흡에 맞춰 작업하던 개인 작업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창작자에게 버티는 노하우를 공유해주세요.

제가 이전에 다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글자는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성도 중요하지만,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를 찾아서 그려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폰트 디자이너는 더욱더 그렇다. 폰트는 상당히 긴 시간을 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능동적인 태도로 작업해야 하는데, 본인이 그리는 글자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야만 글자 한 벌을 완성할 수 있다.” 이렇듯 저는 창작자에게 즐거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금전적인 보상도 정말 중요하지만, 창작의 동기가 오로지 그쪽에 쏠린다면 긴 시간 동안 창작을 지속하기는 힘들다고 봐요. 그런데 이런 부분이 노력으로 해결가능한 영역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노력한다고 즐거움이 성취되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좋아하는 것을 오랫동안 만들어내는 창작자는 아마 즐거움을 타고난 것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장기하, 공중부양, 부럽지가않어

Artist

채희준은 계원예술대학교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고, 졸업 이후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새로움이나 트렌드를 추구하기보다, 글자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형태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글자를 만든다. ‘청월’, ‘청조’, ‘초설’, ‘고요’, ‘신세계’, ‘탈’, ‘고요 라운드’, ‘클래식’, ‘기하’ 등의 폰트를 출시했고, 현재 채희준 폰트샵에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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