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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쉼표를 찍어, 너의 인생에

Writer: 김윤하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윤하 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중음악평론가로 잘 알려진 분이에요. 얼마 전에는 100분 토론에 나와서 조곤조곤하게 단단한 의견을 토하기도 했죠. K팝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하지만, 사실 K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답니다. 평론가로서 날카로운 펜을 들던 그에게 «비애티튜드»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청했어요. 음악과 엮이며 우당탕 돌아가는 윤하 님의 삶에서 기억에 남는 노래는 무엇일까요. 다른 곳에서 살펴보지 못할 김윤하 평론가의 에세이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내 인생의 첫 쉼표 / 오늘에서야 잃어버린 미소를 난 되찾아 / 내 맘속의 첫 쉼표
/ 완벽한 세상 아닐지라도 / 여유 속에 삶은 달라져 첫 시도
― 소녀시대의 ‘쉼표’(2018), ‹몰랐니 – The 1st Single Album OH!GG› 중에서

내가 자신을 아끼는 법을 전혀 모르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우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한민국의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프리랜서 19년 차다. 일반적으로 음악평론가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실상은 음악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다. 라디오로 예를 들어 보자. 내가 라디오에서 처음 시작한 일의 명칭은 PDJ였다. PD와 DJ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연출과 진행을 동시에 하는 가성비 갑의 직종이었다. 불길하게도 시작부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치워 버린 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작가와 게스트 역할마저 섭렵해 버렸다. 연출, 진행, 작가, 게스트, 포 카드(Four Card). 나 하나만 있어도 1인 4역으로 프로그램 하나를 뚝딱 만들 지경이었다. 어쩐지 대단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시간만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출퇴근처럼 하루치 일의 시작과 끝이 존재했고, 자정을 넘기는 야근에 주말 특근도 흔했다. 절망적인 건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 보통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타인의 탓으로 돌려 이 분노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띄는 건 이 지옥을 정말 내가 만든 게 맞냐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나뿐이었다. 가끔은 그저 나에게 일을 맡겼다는 이유만으로 이 불구덩이에 함께 끌려 온 담당자를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에게 기꺼이 결투장을 던져야만 했다.

경력이 쌓이고 요령이 늘면 자로 잰 것처럼 멋지게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프로가 될 줄 알았지만 한가한 기대였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허덕였고, 없으면 없는 대로 허덕였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당장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가성비 프리랜서는 받아야 할 일과 받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 못 하고 우선 받아버리는 ‘우선 주세요’란 불치병에 걸려 버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시 퇴근은커녕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는 것도 요원했다. 평일에 마치지 못한 일을 주말의 나에게 미루는 일이 늘었고, 주말의 나는 평일의 내 멱살을 잡고 너 죽고 나 살자 눈물 콧물을 쏙 빼기 일쑤였다. 꽥 소리도 못 내고 죽어나는 건 하나밖에 없는 몸뚱이였다. 밑천이라고는 그거 하나뿐인데, 미련한 19년 차 프리랜서는 그 중요한 사실조차 잊은 채 눈앞에 닥친 구름떼같은 재앙을 쳐내는 데에만 골몰했다. 가끔은 이것이 프리랜서의 숙명인가, 가볍게 취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숙명 같은 소리 하네. 내면이 호통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세상엔 생각보다 프리랜서가 많았고,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같은 프리랜서라도 이렇게 종족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것은 마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점프해 진화한 인류 같았다. 호모 사피엔스-프리랜서는 휴일 없이 일하더라도 매일 아침 운동은 빼먹지 않는다거나 적어도 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날을 정기적으로 만들었다. 더 부지런한 이들은 열심히 일한 나에게 호캉스나 여행을 기꺼이 선물했고, 그 경험을 남들과 낱낱이 나눴다. 그것도 아주 쿨하고 멋진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저렇게 부지런하고 센스가 넘칠 수 있지?’ 그렇게 오랫동안 일해왔건만,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 모두가 아직 머나먼 호모 사피엔스-프리랜서로의 진화인 것처럼 느껴졌다.

쉼표. 그러니까 나에게는 쉼표가 필요했다. 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고 분명하게 찍힌 동그랗고 뾰족한 문장 부호, 그게 필요했다. 생각했다. 나에게도 그런 게 있었나. 기억의 주머니를 뒤지다 뾰족한 끝에 손가락이 닿았다. 때는 2011년 마지막 날,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미국행을 결정했다. 처음 아르바이트가 아닌 회삿돈을 받고 일을 시작한 이후, 난 2000년대가 저물어 가는 동안 내내 라디오에 몸이 매여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DMB가 한참 성행하던 시기였다. 기존 방송국들에 채널 하나 운영해 보고 싶어서 기웃대던 기업, 단체, 사람들이 죄다 DMB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나에게도 제법 일거리가 생겼다. 여전히 취미처럼 음악 글을 쓰며 밤낮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루에 생방송만 네 시간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오후에는 일본어 방송, 저녁에는 퇴근길 방송. 4시에 명동에서 생방송을 마치고 6시까지 공덕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 생방송에 지장이 갈만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매일 전력으로 뛰었다. 방송 1분 전 아슬아슬하게 스튜디오에 도착하거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 턱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스튜디오에 몸을 던지는 각종 기기괴괴에도 불구하고 일은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때 그렇게 그럭저럭 굴러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는 여전히 우당탕탕대며  2011년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안녕을 맞이한 것이다. 누가 짜라고 해도 못 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메인으로 하던 일은 물론 소일거리처럼 하던 일도 모두다, 한 번에 종료 버튼이 눌렸다. 마지막 생방송을 마치고 남산에서 청계천 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엄마가 그냥 회사 취직하라고 할 때 할 걸, 나답지 않은 후회도 좀 했다. 평소라면 기분전환 겸 남산이나 한 바퀴 돌자 했겠지만, 그날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을지로3가역이 슬슬 가까워졌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한 해 마지막 날엔 다들 보통 뭐하면서 보내나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생각에 골몰하다 문득, 옥외광고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흰 바탕에 오렌지빛 네 글자, ‘유학닷컴’. 모든 지구인이 2011년 마지막 밤을 불사르기 위해 꽃가루를 담고 샴페인을 흔든다 해도 나는 오직 나만의 길을 걷겠다는 듯, 광고판은 도도하고 꼿꼿하게 빛나고 있었다.

홀린 듯이 간판을 따라 들어간 나는, 한 시간 뒤 유학닷컴 네 글자가 커다랗게 박힌 파일을 소중히 품어 안고 건물을 나왔다. 파일 안에는 내년 3월 입학 절차를 밟을 어학원의 소개 책자와 계약금 10만 원에 대한 영수증이 들어있었다. 불과 3시간 전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스펙타클한 전개였다. 파일을 안은 심장이 마치 삼수 끝에 호그와트 입학허가서를 받은 머글처럼 터질 듯 뛰었다. 설렘만  담긴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아무 계획 없이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마음과 도저히 안 되겠으면 10만 원 좋은 일에 썼다고 생각하자는 극도의 P 다운 마음이 분초 단위로 다툼을 벌였다.

그게 내가 내 인생에 찍은 첫 쉼표였다. 그 무모함이 쉼표였다 단언할 수 있는 건 그 쉼에 정말 아무런, 일말의 목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상이라거나 오랫동안 꿈꿔온 미국 유학의 꿈, 이런 건 단 한 조각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인생에 오래 남을 인상적인 쉼표를 하나 찍고 싶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한 번쯤 그래 보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을까?’라는 생각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인생에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 나아가 증명하고 싶었다. 물론 부모님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영어가 필수라는 생각에 과감히 결정했다는 공익광고 풍 감언이설을 늘어놨지만 말이다.

출처: 필자 인스타그램

객기에 찬 가설은 현실이 되었다. 꽉 찬 나이에 적금까지 깨가며 갑자기 미국에 가겠다는 자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님을 세 치 혀로 안심시키며 떠난 생의 유예.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내 인생은 그 어느 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앞서 말하지 않았나.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온통 웃고 뛰노느라 영어는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대신 나는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줄 알았던 스무 살을 한 번 더 살 수 있었다. 오전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친구들과 라운지에 모여 오늘은 어디서 하릴없이 빈둥거릴까 궁리했다. 온 동네 공원과 친구 집을 쏘다니며 낮에는 프리스비를, 밤에는 보드카 젤리를 먹으며 비어퐁을 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거란 걸 그제야 알았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보낸 쉼표 뒤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여전히 해나가고 있다. 그 안에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도, 게으르지만 완벽을 바라는 집념도, 내 사주에 유일하게 들어와 있다는 인복도 있었다. 그 한가운데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야망도 없이, 그저 쉼 그대로의 쉼표를 찍어도 삶은 흘러간다는 사실이 뚜렷이 자리한다. 2018년 소녀시대 태연∙써니∙효연∙유리∙윤아로 구성된 유닛 그룹 소녀시대-OH!GG가 발표한 ‘쉼표(Fermata)’를 내 삶 깊은 곳에 넣어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열심히 달려온 이에게 어느 날 주어진 탁 트인 휴식의 순간. 그 순간이 비록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시도만으로 달라지는 내 삶의 첫 쉼표를 소중히 끌어안는 마음. 그러고 보니 확신할 수 있는 게 딱 하나만 있어도 한 번쯤 전부를 걸어볼 만한 게 인생이란 걸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살아도 살아도, 아직도 인생에서 배울 게 이렇게나 많다.

Writer

김윤하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일간지, 주간지, 라디오 등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고 있으며,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활동하기도 한다. 티빙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현재 KBS2 ‹케이팝 메이트›, 지니뮤직 ‹케이팝 탐사대› 진행자이자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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