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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놀라운 러브레터에 바치는 나의 러브레터

Writer: 김도훈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글을 보내주는 김도훈 작가의 본업은 영화평론가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아니, 언제 영화에 매혹되었을까요. 작가는 정확히 말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그의 작품을 보고 영화라는 매체의 신비로운 비밀을 깨달았다고요. 여러 주제를 두고 편집부와 고민하던 김도훈 작가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파벨만스›의 시사회를 다녀온 후 맹렬한 기세로 글을 보내온 것을 보면, 영화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글을 다 읽어 내려갈 때쯤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이 순수한 러브레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 글은 러브레터다. 내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영화를 처음으로 본 건 1985년이었다. 물론 1976년생이 기억하는 1985년은 좀 흐릿하다. 적잖게 왜곡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건 엄마 손을 잡고 둘이서 갓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2›를 보러 갔다는 사실과, 나오면서 했던 생각들이다. 당시 세 살 터울인 내 동생은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다행이다. 동생은 ‹인디아나 존스 2›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에 일찍 매혹을 느끼지 못했다. 덕분에 영화에 관한 글을 써서 겨우 먹고사는 형과는 달리 훨씬 수익이 좋은 전문직을 골라 잘살고 있다. 내 인생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망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2› 포스터

그래도 아홉 살짜리가 거대한 극장 화면으로 처음 본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 2›라는 건 행운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영화는 아니다. 1980년대 교육의 가장 거대한 화두는 ‘반공(反共)’이었다. 교실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과 영부인 이순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근래 그의 손자가 약에 취해 일가의 만행을 유튜브로 공개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그 시절이 아련해진다. 어린아이에게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려고 할 때 가장 편리하고 강력한 프로파간다는 역시 ‘영화’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는 각 학교를 순회하며 반공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학교에는 극장이 없었다. 대신 교육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강당이나 큰 교실에 간이 천막을 스크린으로 만들어 반공 영화를 상영했다. 1970~1980년대 생들이 여전히 기억하는 추억의 국산 애니메이션 ‹똘이장군› 시리즈와 ‹해돌이 대모험›은 전국을 순회하며 무료로 상영됐다. 그냥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돼지 형상을 한 공산당과 김일성이 마지막에 등장했는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소년 주인공이 싸그리 처단했다. 그런 장면에 모두가 환호했다. 물론, 나도. 영화관 가는 게 지금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에는 컴컴한 공간에서 큰 화면으로 뭔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마술 같았다. 그러니 처음으로 진짜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최신 블록버스터를 목도한 아홉 살짜리 아이의 심경이 어땠을지 한 번 상상해보시라.

‹똘이장군 제3땅굴편› 포스터 (좌)

‹해돌이 대모험› 포스터 (우)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 중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도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이를테면 당대의 마블, 혹은 ‹아바타›였다. 이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는 지금 여러분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21세기 모든 위대한 블록버스터 감독들의 총합에 가까웠다. 1975년 개봉한 ‹죠스›는 900만 달러를 투자해 미국에서만 무려 2억 6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한 편이 2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다. 그게 바로 ‘블록버스터blockbuster’다. 여러분이 지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죠스› 촬영 현장에서 상어 로봇 ‘브루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 1974 Edith Blake/ Courtesy of Moonrise Media

‹죠스› 촬영 현장 ©eyevine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로 블록버스터 개념을 만든 지 2년 후, 그의 차기작인 SF 영화 ‹미지와의 조우›와 조지 루카스의 첫 번째 ‹스타워즈›가 공개됐다. 나는 그해, 그러니까 1977년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할리우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분기점이라고 확신한다. 두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할리우드의 아날로그 특수효과는 형편없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1968)는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나간 ‘오파츠OOPArts’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할리우드에서 SF나 판타지는 B급 영화의 영역에나 머무르던 장르였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진화시켰다.

친한 친구 사이인 스필버그와 루카스 주변에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모였다. B급 장르를 좋아하던 영재들이 모였다. 컴퓨터 그래픽스(CG)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전 세계 관객에게 시각적 환희를 안겨준 1980년대의 대표적인 영화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들을 ‘스필버그 사단’이라고 불렀다. 나는 내 유년기를 지배했던 스필버그 사단의 영화를 요즘도 정기적으로 다시 보곤 한다. 조 단테Joe Dante의 ‹그렘린›(1984), 리처드 도너Richard Donner의 ‹구니스›(1985),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의 ‹백 투 더 퓨처›(1985) 시리즈는 물론, 스필버그의 ‹E.T.›(1982)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블록버스터 영화 작법의 기본을 만들어냈다.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 촬영 현장. 좌측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해리슨 포드, 그리고 숀 코너리. © PARAMOUNT/EVERETT COLLECTION

자, 여기서 다시 1985년 마산의 한 극장으로 돌아가 보자. ‹인디아나 존스 2›의 클라이맥스는 지하 갱도에서 광차(鑛車)를 타고 벌이는 추격 장면이다. 나는 굉장한 속도로 펼쳐지는 현란한 추격을 가쁜 숨을 내쉬며 보다가 깨달았다. ‘이건 가짜구나. 이건 진짜가 아니구나. 눈속임이구나. 만든 거구나.’ 아홉 살짜리가 영화를 보다가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깨달았다. 사람을 진짜로 광차에 싣고 탈선한 갱도를 달리면서 찍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바로 효과였다. 특수효과.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극장을 나오면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영화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영화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맥북 앞에 앉아서 마감 시간이 5시간밖에 남지 않은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쓰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과에 지원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행정학과를 갔다. 행정 공부는 하지 않고 영화 동아리에 밤낮이고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자조했다. 누가 그랬다. 영화평론가는 모두 다 실패한 영화감독이라고. 솔직히 평론가가 메가폰megaphone을 쥔다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없겠지만,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2› 의 백미인 갱도에서 광차를 타고 벌이는 추격 장면.

나는 한동안 스티븐 스필버그를 조금 옆으로 제쳐놓고 살았다. 좋아하는 감독을 누가 물으면 스필버그보다 더 세련된 감독들, 더 야심 찬 감독들, 더 실험적인 감독들, 더 젊은 감독들의 이름을 내놓았다. 그게 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침내 CG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쥬라기 공원›(1993)과 ‹우주전쟁›(2004)을 위대한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디아나존스와 크리스탈 왕국›(2008)과 ‹틴틴 : 유니콘 호의 비밀›(2011),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를 보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됐다. 물론 스필버그는 사이사이에 진중하고 품위 있는 걸작들을 만들었다. ‹워호스›(2011)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 그의 감각은 조금 낡아버린 것 같았다. 특히 나는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왕국›을 보며 한탄을 했다.
1980년대에 머무른 이야기에 CG로 범벅했기 때문이다.

‹파벨만스›를 보며 나는 그 모든 한탄을 접었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가 영화라는 환상을 동경하며 성장해 결국 할리우드에 발을 딛는 것으로 문을 닫는 이야기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 소년은 부모님과 함께 인생 첫 영화를 보러간다.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의 ‹지상 최대의 쇼›(1952)다. 그 영화에서 어린 파벨만, 아니 스필버그를 사로잡는 건 1950년대로서는 최고의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만든 기차 충돌 장면이다. 그 순간 어린 스필버그의 눈은 깨닫는다. ‘이것은 가짜구나. 이건 진짜가 아니구나. 눈속임이구나. 만든 거구나.’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영화를 보다가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깨닫는다. 극장을 나서는 아이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굉장한 것인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파벨만은, 아니 스필버그는 영화에 대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파벨만스› 촬영 현장에서의 스티븐 스필버그

‹파벨만스› 스틸컷

그렇다. 나는 위 문단에서 이 글의 중간 즈음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다시 활용했다. 게으른 활용이니 원고료는 조금 깎여도 큰 불만은 없다. 아니 잠깐,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평론가 나부랭이는 자기의 소년 시절을 스필버그와 동일시하는 뻔뻔한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아주 뻔뻔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이다. 나는 스필버그가 아니다. 극동의 한 작은 국가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사는 영화 언저리의 잔챙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가 놀라운 사람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이다. ‹파벨만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자 중 한 명이 컴컴한 공간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다 같은 현현을 경험한 적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그리고 이 글은 그 놀라운 러브레터에 바치는 나의 러브레터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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