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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현대미술 설명서: 전시 공간은 우리를 기억할까?

Writer: 박재용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전시장이 있지만 매년 전시는 훨씬 더 많이 열린답니다. 한정된 전시장에서 어떤 전시가 시작하면 앞서 열린 전시의 흔적은 깔끔히 지워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하죠. 이후 미래의 전시가 다가오면 현재 열리던 전시의 풍경은 다시 소멸해요. 꽤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작가는 전시-공간-기억에 대한 관계를 다시 한번 뒤돌아봅니다. 그 전시가 열렸던 그 공간에 대한 그 기억은 과연 잊히는 것일까? 혹시 기억은 켜켜이 쌓여 우리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과연 새로운 전시에서 이전 전시의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재용 작가의 흥미로운 추론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전시 공간: 전시가 리스폰하는 곳?

전시 공간은 이상한 장소다. 이른바 ‘화이트 큐브’는(물론 오늘날 미술 공간은 ‘블랙 박스’나 ‘그레이 존’처럼 좀 더 다양한 방향을 추구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을 삭제한 곳처럼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전시 공간은 무엇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장소다. 미술관으로 한정해 보자면, 전 세계 주요 도시의 공공 미술관 대부분은 도심의 노른자 땅을 점유한다. 대개 야트막하고 널따랗게 지은 미술관은 공간을 거의 텅 비워 놓고 쓴다. 용적률과 땅값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개발업자가 통탄할 만큼 비효율적인 공간이라 하겠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이 그 빈 곳을 열심히 채우고 있다.)

이런 전시 공간은 어떻게 작동할까? 일정한 간격으로 문을 열었다 닫고(대개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 널찍한 공간에 이른바 ‘작품’이라고 여기는 것을 띄엄띄엄 걸어두거나 배치한다. 방문객이 많든 적든 별도의 인력을 고용해 하염없이 공간과 방문객을 지켜보면서(책이나 노트 등을 쥐고 전시장 한쪽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앉아 전시장을 응시하는 ‘지킴이’를 누구나 한 번쯤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다), 공간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쓴다. 세금을 예산 삼아 돌아가는 공공 미술관만 그런 게 아니다. 상업 갤러리, 제도권에 살짝 발을 걸친 대안 미술 공간 역시 운영 방식은 거의 비슷하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문을 열었을 때 촬영한 홈비디오. 2023년 현재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 보자.

영상 :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혹시 이런 전시 공간이 우리를 기억할까? 그럴 리가! 애초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도 아닌 공간이 우리를 기억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전시 공간은 기억보다 망각과 더 친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오버워치› 같은 게임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플레이어가 ‘리스폰respawn’하는 것처럼,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샌드박스sandbox’ 형 게임에서 맵을 재설정하는 것처럼, 전시 공간은 지금 진행 중인 전시가 끝나고 다음 전시가 열릴 때마다 완벽하게 재설정하며 재부팅 하는 듯 보인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 개의 전시 공간이 있는 미술관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수십 명의 큐레이터가 일하는 이곳은 다양한 장르 및 주제, 나이, 국적의 예술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에 있는 미술관 중에는 여러 분관을 운영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 년에 수십 개의 전시가 열리는 이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마치 다중 인격을 지닌 사람처럼 끊임없이 다른 정체성을 장착하고 벗기를 반복한다. 몇 주 전까지 큐레이터 A의 기획으로 현대 미술의 거장이 남긴 유산을 강조하는 전시를 열었던 곳은 이제 큐레이터 B의 기획 아래 새롭게 떠오르는 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변신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벽을 세웠던 곳에는 좌대가 놓이기도 하고, 그림을 잔뜩 걸었던 흰 벽은 컴컴한 영상 작품 상영실로 변하며 온 데 간 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나저나 전시 하나를 치를 때마다 만들었다가 부수는 엄청난 양의 가벽과 좌대 및 집기는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갤러리 기후 연합(Gallery Climate Coalition, GCC)은 galleryclimatecoalition.org 통해 미술 전시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가이드라인, 배출량을 줄이는 방법 등을 상세하게 제공한다. ‘미술 전시 탄소 배출량 계산기’를 살펴보길 권한다. 링크: https://galleryclimatecoalition.org/carbon-calculator/

이미지 : Gallery Climate Coalition(GCC) 웹사이트

전시 공간은 무엇을 기억할까?

다시 질문을 던져 본다. 혹시라도 전시 공간은 우리를 기억할까? 전시장마다 기억력이 뛰어난 미술 유령이 살고 있다면 우리를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 이 유령은 두툼한 장부를 들고서 누가 언제 무슨 전시를 보러 왔는지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한 명씩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전시 공간을 떠도는 유령과 상관없이 그곳에는 분명 기억이 쌓인다. 동일한 공간에서 전과 다른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의 경험 그리고 전시 공간 자체에 남겨져 축적되는 전시의 흔적이 이루는 기억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주체의 정체보단 정보 축적이란 행위의 결과라는 점일 테다.

기억으로 축적된 정보는 독특한 효과를 발산한다. 같은 장소에서 여러 개의 전시를 보면서 매번 다른 맥락,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전시 공간의 면모를 충분히 접한 관객은 특별한 종류의 기억을 갖게 된다. 지금 눈앞에는 분명 이 순간 열리는 전시가 펼쳐져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 보았던 다른 전시의 잔상이 유령처럼 불쑥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때로는 전시와 관계 없이 전시 공간 그 자체가 오랜 친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전시 공간에서 나를 맞이하는 존재는 단지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시장 벽에 난 못 자국을 메꾼 퍼티의 흔적, 과거에 진행한 여러 전시에서 가벽을 세웠던 자리에 남은 자국처럼 켜켜이 축적된 기억 역시 관람객을 맞이한다.

카셀 도쿠멘타를 방문한 모든 방문객이라면 반드시 지나치는 카셀 기차역. 2017년 당시 허기를 채워주던 식당은 5년 뒤인 2022년 사라지고 말았다. ‘익스프레스 – 아시아 – 빠른 서비스 – 레스토랑’ © 박재용, 2017

카셀 도쿠멘타를 방문한 모든 방문객이라면 반드시 지나치는 카셀 기차역. 2017년 당시 허기를 채워주던 식당은 5년 뒤인 2022년 사라지고 말았다. ‘익스프레스 – 아시아 – 빠른 서비스 – 레스토랑’ © 박재용, 2017

시야를 넓혀서 커다란 전시가 열리는 도시에 관한 전시-공간-기억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이 (2년에 한 번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3년에 한 번 열리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아이치 트리엔날레, (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쿠멘타, (10년에 한 번 열리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등을 관람하기 위해 행사가 열리는 시기만 골라서 세계 곳곳에 방문한다. 이때 그 도시들이 나를 알 리는 없지만, 내게 있어 해당 도시와 그곳에 자리 잡은 전시 공간은 마치 가끔 만나 안부를 교환하는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년, 3년, 5년, 10년 전에 그곳에서 보았던 작품들은 이제 자리에 없고, 처음 보는 작품이 대신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매달려 있는 게 인지상정. 마지막 방문에 함께 했던 동료와 다시 한번 그곳에 들른 게 아니라면, 우연히 몇 년 전에 전시를 보러 왔던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면, ‘그땐 여기/저기에 이것/저것이 있었는데!’라며 기억에 관해 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소셜 미디어에 인증샷을 올리면서 “이곳은 O년 전에 OO이 있었는데 지금은 OO이 놓인 자리”라며 구구절절 설명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김동희의 개인전 «Hall 2»는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Hall 1’에 전시-공간-기억을 겹치고 이를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전시 공간 이름에 붙은 숫자 1을 2로 바꾼 «Hall 2»는 유령처럼 나타나는 공간의 기억에 이름을 붙인 모양새다. © 박재용, 2023

김동희의 개인전 «Hall 2»는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Hall 1’에 전시-공간-기억을 겹치고 이를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전시 공간 이름에 붙은 숫자 1을 2로 바꾼 «Hall 2»는 유령처럼 나타나는 공간의 기억에 이름을 붙인 모양새다. © 박재용, 2023

공간의 기억을 포개어 놓아본다면?

사실 이 글은 곧 다음 주에 오픈하는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의 현장을 답사하며 쓸 계획이었다. 1895년부터 명맥을 잇고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야말로 전시-공간-기억의 궁극적인 집합체와도 같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5년부터 비엔날레의 주요 전시 공간인 ‘자르디니 델라 비엔날레’ 공원에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장소를 바꾸지 않고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파빌리온, 즉 국가관을 가진 나라는 (가장 늦게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꿰찬 한국을 포함해) 29개뿐이며, 이들은 매번 같은 건물에서 다른 큐레이터, 다른 작가로 전시를 치른다.

독일처럼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역사가 긴 나라는 건물 자체에 담긴 전시-공간-기억이 만만치 않다. 1909년 ‘바바리아 파빌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독일관은 나치 시절인 1938년 기존 건물을 일부 철거한 후 새로운 건물로 대대적인 수리를 단행했다. 이후 나치 정권의 파시즘 미학을 담은 모습의 전시 공간 자체를 파괴하거나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백남준과 함께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여한 한스 하케Hans Haacke는 나치 시절 설치한 대리석 바닥을 유리창 깨부수듯 박살 냈다), 고고학자처럼 전시장 자체를 탐구하기도 했다. (2022년 독일관 작가인 마리아 아이히호른Maria Eichhorn은 전시장 벽을 조심스럽게 긁어내며 나치 시절부터 겹겹이 덧칠한 페인트의 지층을 드러내고 전시 공간 바닥을 굴착기로 파고 들어가 나치 이전에 세워진 건물 토대를 노출했다)

김동희의 개인전 «Hall 2»는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Hall 1’에 전시-공간-기억을 겹치고 이를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전시 공간 이름에 붙은 숫자 1을 2로 바꾼 «Hall 2»는 유령처럼 나타나는 공간의 기억에 이름을 붙인 모양새다. © 박재용, 2023

마치 자취방의 벽지를 뜯다가 옛 신문지를 발견하듯 1930년대 나치 정권 시절과 20세기 초 바바리아 파빌리온 시절의 토대가 나올 때까지 독일관 벽을 긁어내어 마침내 ‘발굴’에 성공한 마리아 아이히호른의 작업. © 박재용, 2022

하지만 전시-공간-기억은 국가 단위를 대표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파빌리온 같은 전시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억은 전시가 반복적으로 치러지거나 발생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축적된다. 마침 지금 열리고 있는 김동희의 개인전 «Hall 2»(4월 27일~5월 28일)는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시 장소 ‘Hall 1’은 처음에 공장과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촬영 스튜디오로 바꿨다가 점점 더 전시장으로 쓰이는 일이 늘어나면서 여러 전시의 공간과 기억을 담게 된 곳이다. 전시 기획자 권순우는 “전시가 일어나는 기간의 전시장 ‘Hall 1’은 조금 이상했다. ‘Hall 1’의 장점인 비교적 말끔해 보이는 큰 바닥과 벽을, 마치 연장된 화이트 큐브의 일종으로 대하면서 작가(혹은 작품)와 관객 사이에 기묘한 무언의 합의 같은 것들을 전제로 전시의 시간이 열렸다 닫힘을 반복했다.”라고 글에서 밝힌다.

김동희 개인전 «Hall 2» 전경 © 박재용, 2023

언뜻 보면 «Hall 2»는 이해하기 힘든 것투성이다. 전시 공간 ‘Hall 1’에 몇 가지 집기가 놓여 있고, 마치 3D 도면 프로그램 화면에 오류가 난 것처럼 바닥이 푹 파여 있는가 하면, 평소 사무실로 사용했다는 작은 방에는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똑같이 생긴 아이맥 세 대와 사무용 의자 세 개가 놓여 있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반기는 꽤 친절한 텍스트 덕분에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예술 작업과 커머셜 공간 디자인 일을 병행하는 김동희 작가가 소환한 다양한 전시-공간-기억의 모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전시-공간-기억을 실제 공간으로 소환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했을 리 없다. ‘스케치업’ 같은 프로그램 이미지를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의도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기 어려운 전시 공간의 몇몇 모습은 이런 오류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결과니까!)

전시-공간-기억이라는 측면에서 «Hall 2» 전시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국가별로 고정된 파빌리온의 공간과 기억을 다루었던 여러 전시보다 좀 더 흥미롭다. «Hall 2»가 소환하는 전시-공간-기억의 원본을 접한 경험과 기억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전시는 특정 전시 공간에 부착된 기억을 다른 공간으로 가져와서 ‘새로고침’ 해보는 경험을 안겨준다. 김동희 작가가 가져온 걸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이 전시는 또 다른 새로운 전시-공간-기억으로 남게 된다. 전시 공간의 콘크리트 바닥을 잘라 단면을 드러내고 심지어 건물을 덮고 있는 지붕 일부분도 없애 버리면서 ‘Hall 1’이라는 전시장에 흔적과 기억을 덧붙이는 건 물론이다. 다음 전시를 보러 온 어느 관객은 전시 공간 바닥을 메꾼 자국을 발견하고, 천장의 일부를 새로 교체한 흔적을 알아차리게 될 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리한 특정 국가의 파빌리온이나 여러 개의 전시-공간-기억을 포개어 놓은 김동희 작가의 전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어떤 전시 공간을 가더라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기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공간-기억을 쌓을수록 이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조금씩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전시 공간, 다양한 성격을 지닌 전시 공간에서 관객으로서의 시간을 쌓고, 그에 따른 기억을 축적해 보길 권한다. 계속 ‘리스폰’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시 공간에서 켜켜이 쌓인 흔적을 인식하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질 잔상의 풍경과 함께 전시 공간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다. 제한된 기간 벌어졌던 과거의 전시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겹치는 것이다.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NHRB(@NHRB.space)의 공동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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