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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이 주장이 되는 순간

Writer: 최혜진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최혜진 작가는 이번 글에서 생략할 용기에 대해 말합니다. 무언가를 하겠다며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어떤 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더욱더 어렵죠. 하지만 생략은 첨가보다 용감하고 힘이 있습니다. 생략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메시지이자 주장, 초대장이자 질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생략할 용기와 본질을 알아차리는 안목은 경험치와 노력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에 관해 쓰고 있는데요. 고통스럽던 순간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아버지가 내내 나쁜 사람이진 않았어요. 쓰고 싶은 소재이긴 한데…혹시 제가 아버지를 나쁘게 몰아가는 건 아닐까요?”

몇 해 전, 글쓰기 특강에서 한 독자가 질문을 건넸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청중 몇몇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 역시 비슷한 고민으로 서성인 경험이 있어 그의 의중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회고형 에세이 쓰기는 오래 방치한 서랍을 정리하는 일과 비슷하다. 잊고 살자고 결심했지만 잊히지 않는 순간, 늦은 새벽 슬그머니 어깨동무하는 어두운 감정, 공감받지 못한 욕망, 발설하고 싶었지만 삼켜야 했던 말 등이 뒤엉킨 서랍이다. 사람마다 서랍의 크기와 과적 상태는 제각각이지만, 이 점 하나는 확실하다. 깊은 곳에 있던 서랍을 열어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다시 말해 내밀한 기억을 글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보통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서랍에서 차지하는 지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을수록 그는 내 인생에 큰 타격감을 남길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지나가던 행인이 부당한 언사를 보일 땐 곧장 ‘미친 사람 아냐?’라고 거침없이 판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라면 온갖 모순적인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A이면서 B이면서 C이자 D이기도 한 덩어리. (보통 좋은 글감은 이런 상태다.) 글쓰기는 덩어리진 감정과 생각을 끈기 있게 관찰해 원소 단위로 호명하는 작업이다. 성분을 알아보고, 이름 붙이고, 맥락을 이해해야만 정리할 수 있다. 이러니 어떻게 쉬울 수 있나.

‘A이면서 B이면서 C이자 D일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느꼈다고 주장해도 될까?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를 배제해도 될까?’라는 고민은 사실 에세이 쓰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보도문, 칼럼, 리뷰, 평론, 연구 보고서를 쓸 때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작자는 글쓰기뿐 아니라 거의 모든 창작 활동의 시작점에서 맹렬히 이 질문과 대면한다. 문장의 얼개만 남겨보자.

OOO에 대해 써야겠다(만들어야겠다). ‘OOO가 A하다’고 주장할 예정인데, OOO가 A 속성만 가지지 않았다는 걸 안다. A 속성 외 다른 것은 다루지 않아도 괜찮을까?

‘편집으로 창작하기’ 지난 연재글에서는 의미의 다면성을 강조했다. 책이 서점 매대에 있을 땐 ‘상품’, 유통 창고에 있을 땐 ‘재고’, 쓰레기장에 있을 땐 ‘종이류 쓰레기’, 공공도서관에 있을 땐 ‘장서’, 작가나 독자의 품에 있을 땐 ‘작품’으로 의미가 바뀌는 것처럼,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아버지도 다른 맥락에서는 선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의미의 다면성을 무시하고 땅땅땅, 판결봉을 휘둘러도 될까? 다면체의 한쪽만 강조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 아닐까? 

이렇게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일단 칭찬을 던지고 싶다.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섬세하고 종합적으로 살피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피곤해하는 시대, 복잡한 이해관계나 사연을 단순화해서 세 줄 요약으로 알려주길 기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저런 류의 망설임은 소중하다. 

하지만 창작을 하려면 어느 순간에 결국 주장으로 도약해야 한다. 어떤 정보를 취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지 선택하고, 그 결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야 한다. 자신이 전방위에서 수집한 정보가 모두 동일하게 의미 있다고 여기면 그 무엇도 주장할 수 없다.

그간 만난 에디터 후배 중 업무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은 버리는 일을 공통적으로 어려워했다. 마치 도토리를 양 볼 가득 욱여넣은 다람쥐 같았다. ‘이 내용은 이래서 의미 있고, 저 내용은 저래서 의미 있다’는 생각은 정보 과잉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길을 잃게 만든다. 자신이 하려는 말(주장)을 놓치는 것이다.

글쓰기, 편집, 창작은 오류를 없애는 작업이 아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음에도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 입장을 밝히는 일, 오류를 품고 프레임을 치는 일이다. 프레임 바깥의 다른 가능성, 다른 해석, 다른 견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의 주관성을 드러내는 작업이 글쓰기이고, 편집이고, 창작이다. 오류를 지적 받는 게 두렵다면 자신의 견해가 최대한 내적 완결성과 설득력을 가지도록 의자에 엉덩이 딱 붙이고 써 내려가면 된다.

에디터는 정보를 정리하는 전문가다. 정리는 난잡한 형태의 원재료를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형태로 구분해서 보관하는 일이다. 곧 불필요한 것을 알아보고 배제할 줄 알아야 정리가 가능하다. ‘편집으로 창작하기’ 연재에서 ‘생략할 용기’에 대해 한 번은 꼭 언급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하겠다며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어떤 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어렵다. 어릴 때는 더욱 그랬다. 어떻게든 개성을 표출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 늘 ‘무엇을 더 해야 할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급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종종거리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명확한 아이덴티티, 일관된 맥락과 서사, 날렵한 각을 지닌 이들은 ‘무엇을 하지 말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고, 자기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일에서도, 삶에서도 그랬다. ‘생략’이 ‘첨가’보다 용감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생략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메시지이자 주장, 초대장이자 질문이 되기도 한다.

노순택, ‹검은 깃털 #CHL0401›, 2017

노순택, ‹검은 깃털 #CIF1601›, 2018 © 최혜진

노순택, ‹검은 깃털 #CIJ1001›, 2018 © 최혜진

노순택, ‹좋은 살인 #BJK2209›, 2009 © 최혜진

지난 6월 22일부터 7월 17일까지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 노순택 작가의 개인전 «검은 깃털(Shades of Furs)»은 역광에서 찍은 사진만으로 구성한 전시였다. 사진에서 역광은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으로 여기곤 한다. 광원이 피사체 뒤에 있을 때 피사체의 디테일을 모두 지우기 때문이다. 반대로 ‘윤곽outline’은 한껏 뚜렷해진다. 어둠과 밝음의 중간 지대가 사라지며 둘이 맞닿는 경계면이 날카롭게 인식되는 것이다. 노순택 작가는 전시 작가 노트에 이렇게 밝혔다.

“사람 사진의 경우 중요한 세부는 얼굴과 표정인데, 역광 사진은 그걸 가림으로써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한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진을 대체 왜 찍는단 말인가. (…)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노순택 작가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그림이 있다면 아마 ‹회화의 기원The Origin of Painting› 같은 작품 류가 아닐까 싶다. 장 밥티스트 레뇨Jean-Baptiste Regnault, 조제프 브누아 쉬베Joseph-Benoît Suvée 같은 18~19세기 화가가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산물이다.

장 밥티스트 레뇨, ‹The Origin of Painting›, 1786
조제프 브누아 쉬베, ‹The invention of the art of drawing›, 1791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여성 디부타데스Dibutades는 양치기 청년과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어느 날 청년이 전쟁터로 떠나게 되었고, 이별하기 전날 밤 디부타데스는 벽에 비친 청년의 그림자를 따라 윤곽선을 그린다. 애절하고 애틋한 순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장면을 왜 ‘회화의 기원’이라 부르는 걸까?

만약 디부타데스가 연인의 얼굴 구석구석과 점 하나, 머리칼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면 그의 전부를 기록했을 것이다. 중요도나 우선순위에 대한 고려 없이 전체를 동결하는 작업은 ‘박제’다. 박제는 보는 이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디부타데스가 벽에 남긴 단출한 선은 보는 이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그가 바로 ‘창작’을 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이 『영혼의 미술관』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화가들은 무엇을 기념해야 하고 무엇을 생략해야 할지 적절하게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디부타데스는 연인의 얼굴 윤곽선을 따라 그린 결과물이 향후 자신의 마음에 불러일으킬 효과를 이해하고 있었다. 현실의 연인은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총합이지만, 그를 마음속에 선명하게 붙잡아두기 위해서 모든 정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디부타데스는 편집을 했고, 곧 이는 창작이 되었다.

이렇게 생략이란 중요한 편집 기법을 창작 전략에 사용하는 작가는 아주 많다. 특히 동시대 미술은 빼기의 고수가 벌이는 인식의 전쟁터다. 원래 이번 원고는 빼기에 능숙한 아티스트 이야기로 가득 채우려 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빛과 텅 빈 공간만으로 관람자에게 엄청난 몰입의 경험을 선사하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그냥 보기엔 새하얀 전시장 벽이지만 여기에 UV 라이트 손전등을 비추면 숨은 작품이 살아나는 박관택 작가도 언급하고 싶었다. 그뿐인가. 그림 한 장 그리지 않고도 아름답고 황홀한 그림책 『눈처럼 생겼어(It Looks Like Snow)』을 펴낸 안무가이자 그림책 작가 레미 찰립Remy Charlip 이야기도 길게 늘어놓고 싶었다.

제임스 터렐, ‹레이마르 파랑›의 부분, 1969 © 최혜진

제임스 터렐, ‹레이마르 파랑›의 부분, 1969 © 최혜진

박관택 개인전 «여백» 포스터 © ARKO

레미 찰립, 『눈처럼 생겼어』의 부분, 1957 © philnel.com

초고에서는 흥에 취해 줄줄 설명했지만, 탈고하며 많은 분량을 지웠다. 편집은 자신이 의도한 효과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재료를 알아보고 남겨두는 작업이다. ‘편집으로 창작하기’를 연재하는 에디터 최혜진이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이런 질문이다. “생략이 언제나 좋은 전략인가? 생략이 주장이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나?” 미술 관련 지식을 줄줄 쓰면 열심히 공부했다는 성실함을 어필할 수 있겠지만, 이는 원래 목적과 거리가 멀다. 뺄 것을 알아보는 일은 19년 차 에디터에게도 쉽지 않다.

생략이 임팩트를 만들 때 수용자는 초대장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 궁금증과 함께 정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작가의 세계와 자기 세계를 부지런히 오간다. 이럴 때 생략은 그 자체로 주장이 된다. 반면 모호함 뒤에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는 창작자도 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화하지 못해서 빈약한 이미지만 나열한다. 그들이 구사하는 생략은 가짜다.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을 지니려면 먼저 자기만의 정의가 필요하다. 일을 시작한 애초의 목적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같은 재료와 정보도 A의 관점으로 보면 군더더기이고, B의 관점에서는 본질일 수 있다. ‘코끼리 코’를 하고서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나 이런 유동성 덕분에 해석과 창작의 영토가 이토록 드넓은 것이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말자.)

정답 없는 ‘다중 시점의 망망대해’에서는 오직 정직한 자기 목소리가 나침반이다. 이 목소리는 자문자답을 통해 선명해진다. ‘네가 생각하는 OO는 뭐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작업을 하면 너에겐 뭐가 좋아? 보는 사람들에겐 뭐가 좋아? 사람들은 왜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까?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등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인식의 영점이 잡히고, 자신이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알게 되며, 군더더기를 정의하는 기준도 생긴다.

기준점을 마련하면 이제 수집한 재료를 검증한다. 더했을 때의 효과와 뺐을 때의 효과를 비교하고 기억한다. 수집한 재료가 100개라면 100번의 가능성을 구축했다가 이내 부순다. 생략할 용기와 본질을 알아차리는 눈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경험치와 노력에 비례해 점진적으로 안목이 높아진다. 나는 이 사실에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에디터적 사고력에 왕도가 없다는 사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려 애쓰고 실패와 좌절의 데이터를 통해 배우는 길 말고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는 사실이 좋다. 떨림과 두려움을 품고 조그마한 인식의 사각형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 완벽하지 않을지언정 최선을 다해 그 안을 정돈하고 가꾸는 이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

Writer

최혜진(@writer.choihyejin)은 19년 차 잡지 에디터다. «디렉토리»«1.5°C»«볼드저널» 편집장으로 일했고, 에디터십을 기반으로 기업의 브랜드 미디어 전략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등 일곱 권의 예술서를 썼다. 동료애 기반의 에디터 커뮤니티 ‘Society of Editors’(@society.editors)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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