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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02

당신과 당신의 가장 예술적인 것

Writer: 서윤후
서윤후, 에세이, 문학, 시

Photography © 진채민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 두 번째 이슈의 테마는 ‘스테레오타입’입니다. 문학, 특히 시를 쓰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곤 해요. 시인이라고 하면 응당 이럴 것이라고 어림잡아 짐작하기도 하죠. 2009년 등단한 시인 서윤후는 시인이 가진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왔어요. 더불어 문학적인 것에 대한 오해까지 말이죠. 작가가 찾아낸 문학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시인에 대한 오해의 시작과 끝을 담담하게 풀어낸 아티클에 주목해보세요.

우리의 삶에 있어 문학이 옹호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의 기회를 선사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훤히 드러나 부유하는 얇은 사실 속에서, 진실의 형체를 새로이 빚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실존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뒤안길에서 일렁임으로 머물러 있다.

문학 작품을 읽고, 보이지 않는 작가와 작품의 의도를 파악해온 것은 우리가 문학을 학습해온 단순한 방식 중 하나였다. 사실 그 지표에는 정답이 없기에, 문학이 기꺼이 즐거울 수 있는 것도 정답이 없다는 함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실체가 없어 어림잡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렇게 드리우는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문학적인 것’의 양상은 다르게, 동시에 흘러간다. 독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삶을 아름답게 부유할 수 있도록 만들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계속 넘어야 할 장벽이 아닐 수 없다.

일련의 과정과 시절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마음에 병이 나서 이마에 난 뾰루지를 쥐어짜며 눈물이 고이게 된다거나, 자도 자도 굴속에 있는 것만 같은 아득한 어둠을 느끼게 된다거나. 몸이 고스란히 반영하는 마음의 성정처럼 문학 또한 우리가 살아내는 것들의 통증을 언어로 일궈낸다.

문예 창작을 전공하면서, 나는 ‘문학적인 것’에 대해 자주 골몰했다. 턱을 괴고 망상에 빠지는 일처럼 그리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문학은 책 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이기도 했고, 누군가 꾼 허황된 꿈 이야기에도 있었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 위에도 흩뿌려져 있었다. 아침 만원 버스에 탄 사람들의 구겨진 표정 속에도 있었고, 분주히 제 갈 길을 가는 길고양이의 휜 꼬리에도 맺혀 있었다. 한참이나 찾았던 물건을 코트 안주머니에서 허무하게 발견했을 때에도, 오랫동안 양파를 볶아 끓인 카레 속에서도 문학은 있을 수 있었다. 내가 마주하게 된 생활의 양상 속에서, 나의 설명할 수 없었던 부분을 빗대면서 그렇게 삶을 조금씩 끄덕이게 되었다. 그게 문학적인 것이라면, 문학적인 것은 너무나도 많고 동시에 아무 데에도 없는 것이기도 했다.

시인이라고 해서 이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니네요?

그런 단골 인사를 들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시 쓰는 사람들은 모두 별로였으니까. 대학 시절에는, 흡연하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술이나 여자 이야기나 실컷 하면서 문학을 하는 포즈만 취하던 선배들이 싫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시인들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떠벌리거나, 시 쓰는 자기 자신을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싫었을까? 골방에서 병들며 자신의 삶을 투신하고, 원고지 위에서 자주 접질리던 하찮은 시인의 이미지가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건 신비 속에 문학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드러나지 않고, 적당히 숨기면서 자신을 은닉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아우라를, 노스페이스 패딩처럼 매일 껴입고 다니던 선배를 가끔 생각하며, 나는 학교를 떠나와 여전히 시를 썼다. 그들 사이에선 성실함이나 착한 심성이 도리어 놀림감이 되었다. 죽음을 농담처럼 말하고 피폐한 삶이 자랑이 되는 ‘문학적인 것’에 대해 나는 일찌감치 회의감을 느꼈다. 신비 속에 갇혀 있던 문학 뒤로 은폐해온 많은 진실이 폭로되던 2016년 늦겨울엔, 나는 희미해져 가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가만히 떠올려보기도 했다.

서윤후, 에세이, 문학, 시

그럼에도 ‘문학적인 것’에 대한 호출에 응답해오면서, 문학적인 것을 강요받아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문학적인 것을 규정하고, 그것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키며 출처가 불분명한 문학적인 것에 심취해야만 했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이십 대를 온전히, 잘 구성된 새장을 바라보며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문학적인 것의 안과 밖을 오해하는 것으로 보냈다. 사람들이 인정해줄 법한 것으로 문학적인 치장을 했을 땐 복면을 쓴 사람처럼 용감해지기도 했다. 누구나 그럴듯하게 끄덕일 수 있는 문학적인 합의를 찾는 것에 이십 대를 온전히 할애했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노래를 묻는다면? 나는 방금 소녀시대 노래를 들었지만, 시규어 로스를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그건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활적인 것, 주변의 사소한 것을 작품 소재로 쓰는 것이 촌스러웠다. 서정시가 아니라 그 반대편 전위적인 곳에 나의 문법이 있다고 믿으며, 매일 안간힘을 쓰며 쥐고 있던 슬픔과 사랑은 억누르면서, 내가 돌아오지 않는 시를 썼다. 내가 아닐수록 좋았지만, 앞이 보이질 않았다. 자주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시가 전부여선 안 되지만 또 그럴 수도 있겠다며 오지도 않은 미래를 낙담했다. 문학적으로 나는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처럼. 그 꾸며낸 모습을 걷어내니 그때의 내 모습도 함께 지워져 버렸다.

정형화된 틀에 갇히는 게 싫었지만, 자신 스스로를 옭아매며 가두게 된 것은 문학이 건넨 또 다른 함정이었다. 문학적인 것을 오래 생각하다가, 정작 문학적인 것에 다가서지 못하게 된 시절을 잰걸음으로 걸었을 땐 책을 읽는 일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타인의 입김 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버리는 내 모습을 되찾는 것은, 문학적인 것에 대한 관측을 그만둔 일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문학적인 것은, 몸에 옮겨붙는 베드버그 같은 것이다. 불분명한 출처에서 와 선명한 통증을 남기고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려움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긁고, 흉진 상처를 서서히 잊어가는 동안에 시는 종종 찾아왔다. 이따금 홀연히 떠나가기도 했다.

문학적인 것을 꿈꾸었으나, 그 정면은 나의 오랜 뒷모습에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는 기다림의 형태로. 문학적인 모든 것은 뒤돌아봄에서 출발했다. 갈 길이 먼 게 아니라, 돌아갈 길이 아득한 것이 문학이 준 일상이었다. 아직도 누군가가 시인이라는 단서로 나를 재단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준비된 문학적인 답변을 떠올린다. 삶도 문학적이길 바란 적은 없다. 문학이 삶이 되는 일도. 누군가의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리고 싶다는 생각. 새장을 열어두고 살고 싶다는 생각. 생각에 미쳐 도착하지 않는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물에 빠진 채로, 다시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삶을 바쳐 발버둥 치는 한 사람의 몸짓을, 문학적인 것이라고 다 설명할 수 없기에.

서윤후, 에세이, 문학, 시

Writer

시인 서윤후는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seou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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