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디파인 서울 2023

디파인서울, Define-Seoul
Review

디파인서울, Define-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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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혹시 아트페어에 관심 많으신가요? ‘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만들어낸 올가을 서울의 아트 신은 화제 만발이었는데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 아트페어, ‘아트 부산’이 10년 넘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아트부산이 얼마 전 새로운 페어를 서울에 론칭했어요. 지난 11월 1일부터 5일간 성수동 일대에서 열린 ‘디파인 서울DEFINE SEOUL 2023’입니다. 컬렉터블 디자인과 예술품을 함께 다루면서, 지루한 컨벤션센터를 벗어나 성수동 곳곳에 자리한 여러 전시장을 산책하는 콘셉트는 여러모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디파인 서울에 대한 깊이 있는 리뷰와 생동감 있는 현장 사진, 더불어 페어를 지휘한 정석호 아트부산 이사의 인터뷰까지! 비애티튜드만의 시선으로 디파인 서울을 기록하고, 살펴보고, 그 의미를 복기했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특별한 콘텐츠를 지금 바로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좋은 경험은 쉬이 휘발되지 않는다. 서서히 사라지며 존재감을 남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함께 겪은 사람에게는 대화의 주제로, 모르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그리고 모두에게는 다시 한번 경험하길 원하는 아쉬움으로. 지난 11월 1일 성수동 일대에서 열린 ‘디파인 서울DEFINE SEOUL 2023’은 이에 대한 좋은 예인 것 같다. 행사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디파인 서울 이야기가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가보셨어요?”라는 확인과 “참 좋았더라” 같은 상찬부터, 자기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하거나,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모든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아직 어떠한 정보도 없는 내년 디파인 서울에 대한 기대감이다. 무엇보다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레퍼런스로 튀어나오는 경우였다. “아, 그렇죠. 얼마 전 열렸던 디파인 서울처럼 말이에요.” 같은.

디파인서울, Define-Seoul

듣는 이가 당연히 알 것처럼 각종 대화에서 호명되는 디파인 서울은 놀랍게도 올해 처음 열린 행사다. 게다가 글로벌 오거나이저가 기획한 해외 행사의 서울 버전도 아니다. 온전히 로컬에서 기획한 오리지널이다. 요 몇 년간 서울에서 열린 흥미로운 문화 행사 중 가장 파급력이 컸던 예시로 ‘프리즈 서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때 ‘드디어’라는 표현이 참으로 많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이 존재를 인지하던 해외 유명 아트 페어가 서울에서 열리는 사건에 대한 감회와 신기함이 복잡하게 얽힌 반응이었다. 흥미롭게도, 디파인 서울에 대해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 또한 ‘드디어’였다. 어쩌면 디파인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과 행사의 정체성은 감탄사에 가까운 이 짧은 단어 하나에 집약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듯싶다. 과연 디파인 서울이 어땠길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걸까.

디파인서울, Define-Seoul
디파인서울, Define-Seoul

디파인 서울은 ㈜아트부산에서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페어 브랜드다. ㈜아트부산은 아트 불모지라 여겨지던 비서울지역, 그중에서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을 중심으로 2012년 아트페어를 시작한 이래 매년 쉬지 않고 5월이면 행사를 지속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여느 아트페어에 뒤지지 않는 국제적인 구성에다, 부산이 지닌 로컬리티에 기반을 두고 아트, 럭셔리, 휴양을 함께 즐기는 콘셉트가 컬렉터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며, ‘아트부산’이란 아트페어는 어느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아트페어 중 하나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다지고 있다.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 10여 년 동안 끌어온 기획과 운영 노하우를 활용해 서울에 도전장을 내민 게 바로 디파인 서울이다.

디파인 서울의 독특한 점은 그 구성에 있다. 아트에 초점을 맞춘 아트부산과는 다르게 디파인 서울은 디자인과 파인아트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행사 이름부터 ‘디자인design’과 ‘파인아트fine art’에서 앞부분을 따와 조합한 결과로, 두 영역을 연결하고 나아가 예술을 대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define)’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여기서 ‘드디어’라는 반응이 나온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아트페어가 보편화된 서구권에서는 행사에서 다루는 작품의 범주가 다양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컨템포러리 회화, 조각, 설치 미술은 물론이고, 귀 따갑게 이름을 들은 미술사 속 거장의 작품이나 뮤지엄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유물을 선보이기도 하고, 세상에 딱 한 점 있는 현대 공예품이나 과거 정력적으로 활동한 유명 가구 디자이너의 빈티지 가구도 페어에 출현한다. 결국 컬렉터의 욕망을 자극하는 ‘컬렉터블스collectibles’가 복합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아트페어다. 이중 아트 퍼니처로 대표되는 ‘컬렉터블 디자인’과 예술품을 동시에 다루는 움직임은 이미 세계 최대 아트페어 스위스 ‘아트 바젤’과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의 특징이 됐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트페어’ 하면 컨템포러리 예술품에만 단선적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디자인과 파인아트를 동시에 다루는 디파인 서울을 보며, ‘드디어, 한국에도 컬렉터블 디자인이 페어에 출현하는구나!’ 감회에 젖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이런 특징은 부스(실제로는 공간이란 표현이 알맞은 장소)의 다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번 디파인 서울에는 국내외 20여 개 갤러리와 브랜드 그리고 디자인 스튜디오가 참여했는데, 이들이 취한 전략에 따라 부스의 콘셉트와 실제로 구현한 풍경이 무척 다채로웠다. 앤더슨씨, PBG, 미미화 컬렉션, 두아르트 스퀘이라, 빈트 갤러리, 화이트스톤 갤러리는 공간 전체를 통합적으로 활용한 점이 눈에 띄었다. 빈티지 가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앤더슨씨, 미미화 컬렉션, 빈트 갤러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공간을 마치 쇼룸처럼 꾸몄다. 조지 나카시마, 피에르 잔느레, 샬롯 페리앙, 장 프루베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 높은 거장들의 빈티지 에디션은 물론이고, 조지 넬슨, 찰스 & 레이 임스, 폴 헤닝센의 작업,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거장들의 작업을 믹스매치해 거실처럼 세팅한 모습에 감탄한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않아 페어의 포토 스폿으로 등극했다. 특히 이 세 곳은 각자 소장한 아트 피스를 함께 배치하여 가구가 실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효과적으로 체험할 기회를 마련했다. 이에 비해 두아르트 스퀘이라와 화이트스톤 갤러리는 거꾸로 행동했다. 컨템포러리 예술을 다루는 갤러리답게 작품 위주로 디스플레이하면서 그 공간에 어울리는 빈티지 가구들을 설치해 화이트 큐브에 덩그러니 놓기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느낌을 추구한 것이다. PBG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만든 라이프스타일 기물을 전시하면서 아트 피스를 함께 선보이며 전시와 생활 공간 어딘가를 떠올리게 했다.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앤더슨씨

앤더슨씨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앤더슨씨

앤더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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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르트 스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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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인서울, Define-Seoul, 빈트갤러리

미미화 컬렉션 (좌), 빈트 갤러리 (우)

미미화 컬렉션 (상), 빈트 갤러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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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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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G

PKM, 탕 컨템포러리 아트, 노발리스 아트 디자인, 갤러리 필리아, 에프레미디스 등 갤러리 활동으로 잘 알려진 곳들은 자기 근본에 맞게 작품에 집중하는 부스를 꾸몄는데, 이런 면에서 매우 독특한 경우는 국제갤러리였다. 국제갤러리는 근래에 자기 작품 세계를 새롭게 확장 중인 홍승혜 작가의 작품만으로 공간을 꾸몄다. 격자무늬가 특징인 플랫한 평면 조형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올해 초 열린 개인전에서 다양한 형태의 입체 작품을 통해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탐색하는 흥미로운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번 디파인 서울 부스에서는 아예 기능을 부여한 가구 시리즈를 만들었다. 벽면에는 그래픽과 입체 작품을, 바닥에는 가구 혹은 특정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물로 확장한 작품을 놓아 전시장 전체가 디파인 서울이 추구하는 콘셉트와 딱 맞아떨어지는 모습이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손색이 없었다.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넓은 루프탑 공간에 이태수 작가의 초현실적인 바위 인스톨레이션 작업 두 점을 놓아 생동하는 성수동의 풍광까지 자연스럽게 작품의 일부로 편입하는 모험에 성공했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유니크한 대형 조명 여러 점을 선보인 지오파토 & 쿰스 또한 개인전을 방불케 하는 부스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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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컨템포러리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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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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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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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앤초이 갤러리

두 번째 ‘드디어’는 장소성에 있다. 수많은 페어가 열리는 장소의 디폴트 값은 거대한 컨벤션 센터다. 행사를 기획하는 주체는 행사 규모에 맞는 크기의 공간을 알아보고, 가벽을 세워 조각낸 부분을 참여자에게 할당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흰색 부스의 연속된 풍경이다. 날씨와 상관없이 정해진 동선에 따라 행사를 둘러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실내를 반복적으로 돌아다닐 때 느끼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에겐 지루함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대형 컨벤션 센터에는 아예 전시장 외에 도보로 이동하는 중앙로, 상점, 정원, 광장 등을 차곡차곡 조성해 놓기도 하고, 행사 규모가 큰 경우 도시의 일정 지역이나 전체를 활용하며 단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도시 곳곳에서 1000개가 넘는 팝업이 열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나, 도시를 아예 전시장으로 쓰는 카셀 도쿠멘타 등이 대표적이다. 천편일률적인 부스 지옥에서 벗어나 바깥 공기를 쐬며 장소성을 확장하고, 더 나아가 행사가 열리는 로컬과 관계를 맺는 경우는 서구권에서 보편적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단 자유롭게 돌아다닐 지역이 애매하고, 해당 로컬 커뮤니티와 엮이는 일까지 기획하기엔 역량이 부족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런데 디파인 서울은 현재 한국, 특히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역으로 떠오른 성수동을 배경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건물 세 곳에서 페어를 나누어 진행했다. 2호선 성수역을 기준으로 아래 지역에 위치한 5층 건물인 앤디스와 길 건너 지역에 분산된 레이어 27과 레이어 41을 잇는 트라이앵글을 만들어 냈는데, 영역 내부에 위치한 TTRS에서는 연계 전시를 진행하고, 그 바깥에 있는 오우드 2호점에서는 ‘디파인 토크’를 진행하며 성수동 지역 일부를 자연스럽게 페어의 배경으로 가져왔다. 덕분에 페어가 열리는 기간 동안 디파인 서울 에코백을 메고 리플렛을 펼쳐 길을 찾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컨벤션 센터 안에서 뱅글뱅글 도는 게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니며 점과 점을 잇듯 여러 건물에 들러 행사를 경험하는 여정은 분명 한국에 없던 페어의 형태다. ‘드디어, 컨벤션 센터를 빠져나오는구나’라는 희열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F&B 시설이 열악하기로 유명한 아트페어에서는 기대할 수 없던 엄청난 숫자의 로컬 F&B 업장, 골목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상점, 더불어 성수의 로컬 커뮤니티와 맺은 연대 등 산책과 쇼핑을 결합한 로컬 체험은 디파인 서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는 일등 공신이었다.

디파인서울, Define-Seoul

디파인 토크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세르주 무이 라운지

디파인서울, Define-Seoul

이 정도만 하더라도 첫 회를 끝낸 디파인 서울은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드디어’가 하나 더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디파인 서울이 예상외로 얻은 성취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바로 구매 연결성의 확충이다. 기존 아트페어에서 불가능했던 전방위적 사고팔기의 가능성을 거의 모든 부스에서 확인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빈티지 가구를 주력으로 삼는 곳이 공간을 꾸미면서 다양한 소품과 아트 피스를 공수했는데, 여기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계속 판매 여부를 물어봤다. 예술품을 선보이는 곳도 마찬가지로 공간에 놓은 각종 빈티지 가구에 대한 문의가 계속됐다. 그래서 디자인과 예술을 복합적으로 엮은 부스에서는 “이건 파는 건가요?”라는 질문이 계속 오갔다. 이런 모습이 의미심장한 까닭은 평소 아트페어라면 아주 소수의 작가만 전략적으로 노출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부스가 갤러리의 인상을 대표하는 상황에서 부스의 결을 애매하게 만드는 행동은 최대한 지양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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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디자인과 예술을 캐주얼한 공간에서 통합적으로 다루는 디파인 서울은 제약이 거의 없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다루든, 어떤 컬렉터블 디자인을 다루든 퀄리티와 방향성만 확실하다면 많은 이의 호응을 이끌 수 있다. 예술적인 생활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물건들의 존재가 서로 시너지를 이루어 소장 욕구를 자극하고, 가격대와 성격이 천차만별인 기물들을 자연스럽게 함께 배치할 수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페어에서 모든 전시품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구매가능한 상태로 보여주는 경우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전례가 없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구경하다가도 마음에 꼭 드는 무언가를 조우하면 가격에 대해 부담 없이 물어볼 수 있는 접근성 또한 기존 아트페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연해졌다. 더불어 갤러리 입장에서는 디파인 서울 기간에 성수동 한복판에서 위탁 판매를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 또한 고무적이다. ‘드디어, 아트페어에서 다양한 물건을 마주하는 연결성이 마련되는 걸까?’ 괜스레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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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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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 아트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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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파토 & 쿰스

지난 11월 1일부터 5일까지 총 5일간 열린 디파인 서울 2023 행사가 성료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방문 인원은 6000여명. 갤러리마다 여러 거래가 성사되고, 많은 브랜드에서 주최 측에 협업 제안을 했다는 보도 자료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년 최소 두 배 이상의 사람들이 방문할 때 장소와 동선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매우 난처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겠군. 부스를 구성하는 갤러리 역량에 따라 아트 피스와 디자인 피스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컬렉팅 입문 장소로 자리 잡을 수 있겠군. 성수동이라는 로컬리티를 살린다면 MZ세대의 아트 마켓 유입과 더불어,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의 저변이 넓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정부 및 지자체와의 유기적인 협력이 꼭 필요하겠군.’

아직 첫 회라서 내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부디 앞으로 더욱더 유의미한 성취를 거두길 바란다. 혹시 아는가.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성장을 통해 ‘드디어’ 엄숙한 아트페어에 대한 편견이 사르륵 녹아들지, ‘드디어’ 예술과 디자인이 우리 삶에 더욱 가깝게 스며들지, 그리고 ‘드디어’ 뻔하지 않은 방법으로 일상이 풍요로워질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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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정석호 아트부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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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인 서울 2023’ 성료를 축하드립니다. 업의 특성상 종료 직후 페어의 성과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데요. 한 달이 지난 지금, 내부적인 평가는 어떤가요?

첫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차별화된 콘셉트와 방향성을 선보이며 미술계 안팎에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선한 페어”라는 평을 받은 게 가장 큰 성과입니다. “디파인 서울이 국내 아트신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아트뿐 아니라 디자인과 공예까지 접목한 콘텐츠를 성수를 거점으로 소개한 건 신의 한 수였다.”라는 피드백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어요. 특히 페어와 성수를 함께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는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비록 사전 정보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많은 작품이 페어와 애프터 세일 때 판매되었고요. 디자인을 함께 소개한 덕분에 현장 판매나 B2C 이외에 B2B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구매 상담과 견적 요청이 밀려와 B2B2C 플랫폼으로의 확장가능성을 확인한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본업인 아트페어가 아니라 디자인+아트 페어를 새롭게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디파인 서울의 탄생 배경에 대해 공유해 주시겠어요?

디자인은 예전부터 지켜보고 고민해 왔던 분야였어요. 우리나라에는 좋은 디자인 콘텐츠와 작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하고 자신을 노출할 수 있는 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아트부산 행사를 하반기로 연기했던 2020년에는 디자인 섹션을 별도로 소개했었어요.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어서 ‘아트부산 &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했죠. 이후 아트부산은 현대미술에 집중하고, 디자인은 좀 더 제대로 준비해서 선보이기로 했는데요. 한국에서도 컬렉터블 디자인 마켓과 수요가 점차 늘어난다는 판단이 서면서 디자인과 아트를 아우르는 신규 페어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아트부산의 홈그라운드는 부산인데요. 연고 없는 서울, 그중에 성수동을 첫 번째 디파인 서울의 무대로 낙점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희가 이름 때문에 부산에 국한된 기업과 행사라고 오해를 많이 받는데요. 특정 도시나 지역성에 대한 제한 없이 확장을 위한 방향성의 첫 단계에서 선택한 곳이 서울이었어요. 이미 존재하는 많은 행사와 모든 측면에서 다른 행사를 선보이고 싶었고요. 서울 곳곳을 다니며 리서치했는데 성수동 지역이 가진 매력과 역사, 현재, 그리고 잠재력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완성된 장소가 아니라, 저희 행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성수 이상의 지역은 없다고 판단했어요.   

디자인과 예술을 함께 다루다 보면 애매모호함으로 귀결될 수 있는데요. 페어를 준비할 때 주최 측에서 가장 중시한 점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균형감인 것 같아요. 디자인과 아트 중 한 쪽에 쏠리지 않도록 노력했고, 해외의 좋은 콘텐츠 못지않게 한국과 아시아의 콘텐츠를 소개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저희 페어의 방향성에 맞추어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갤러리와 디자인 스튜디오를 선별하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덕분에 각기 다른 공간과 콘셉트에서 비롯한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가 많이 생겼습니다. 국제갤러리만 하더라도 기존 아트페어의 부스 구성과는 달리 앤디스 공간의 특성을 고려해 홍승혜 작가님의 디자인 작업을 솔로 부스 형태로 선보여 많은 주목을 받았죠. 제네바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갤러리 필리아는 디파인 서울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는데요. 카 스튜디오Kar Studio의 신작을 최초로 선보이면서 갤러리 신라와 협업해 아키오 이가라시Akio Igarashi의 회화 시리즈를 함께 배치해 밸런스를 잘 맞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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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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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컬렉터블 디자인하면 전설적인 가구 디자이너의 빈티지 에디션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범주는 훨씬 넓은데요. 동시대 디자인 작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룰 의향이 있으신가요?

세상에는 훌륭한 빈티지 디자인 작품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요즘 국내 갤러리나 브랜드에서 많이 소개하고 있어서 이번 페어에서는 개인의 취향을 더 알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구성했는데요. 하지만 새롭게 소개되었으면 하는 콘텐츠를 발굴하고 유치하는 일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오파토 & 쿰스의 경우, 현장에서 소개한 조명 다섯 점이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서 구매 문의 및 상담을 넘어 유럽 유수의 디자인 갤러리, 스튜디오, 대사관에서 미팅 요청과 행사 문의를 받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앞으로 더 다양한 지역의 디자인 콘텐츠를 다루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활동에도 일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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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파토 & 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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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 아트 디자인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부스 몇 곳을 꼽아주신다면요?

디파인 서울의 특징을 고려해 맞춤형 부스를 구성한 곳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더군요. 앞서 언급한 국제갤러리에서 꾸민 홍승혜 작가님의 솔로 부스는 갤러리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구성이었고, 높은 층고와 낮은 충고 공간을 다르게 활용해 하나의 단독 전시처럼 연출한 지오파토 & 쿰스, 한국 첫 진출에 맞춰 전속작가의 신작을 최초로 공개한 갤러리 필리아, 그리고 초이앤초이 갤러리가 앤디스 옥상에 설치하며 올해 디파인 서울의 아이콘이 된 이태수 작가님의 장소 특정적 작업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해당 작품은 애프터세일을 통해 판매됐다는 희소식까지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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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앤초이 갤러리

벌써 내년 준비를 시작했을 것 같은데요. (웃음) 이사님이 바라는 ‘디파인 서울 2024’ 모습이 궁금합니다.

올해는 아트페어뿐 아니라 쇼케이스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어요. 디파인 서울의 아이덴티티와 방향성을 설명하고 앞으로 유치하고 싶은 많은 갤러리, 기관, 기업에 저희 행사의 필요성과 매력을 명확히 알리는 중요한 자리였죠. 감사하게도 많은 곳에서 관심을 가지고 문의를 해주셔서 지금도 계속 미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내년 행사는 올해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로 진행하려고 해요. 거점 지역을 즐기는 요소들을 늘리고 해외 기관-컬렉터 그룹과의 교류도 강화해 디파인 서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들이 더 많은 주목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vent

디파인 서울 2023

기간: 2023. 11. 01 – 2023. 11. 05

Place

레이어 27: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11가길 26

레이어 41: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9길 41

앤디스: 서울 성동구 성수일로6길 36

TTRS (연계 전시):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9길 12

오우드 2호점 (디파인 토크):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24길 36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 2021년부터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만드는 «기아 디자인 매거진» 콘텐츠를 총괄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매거진 편집장을 맡고 있다.

따옴표 사이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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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옛 서울역사를 활용한 문화역서울284는 매번 흥미로운 전시로 SNS를 달구는데요. 격년마다 찾아오는 단골인 ‘타이포잔치’가 지금 문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인 타이포잔치의 올해 주제는 ‘문자와 소리’입니다. 문자와 소리, 시각과 청각, 사물과 신체를 연결하고 실험과 실천을 촉발하는 타이포그래피에 주목하는데요. 비애티튜드의 귀중한 필자인 박재용 님이 전시 전반에 걸친 번역과 행사 통역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옳다구나’ 싶어서 리뷰를 부탁드렸어요. 이번 타이포잔치에 관한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전시를 번역하기

리뷰를 시작하기 전,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전시 전반에 쓰인 텍스트 번역과 행사 통역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밝히는 게 좋겠다. 이 전시를 기획하지 않았고, 작가로 초대받지도 않았으나, 통·번역가의 입장에서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생성되는 텍스트와 작품 일부를 그 어느 관객보다 빠르게 살펴보는 기회를 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시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용된 한 명의 성실한 일꾼으로서 내게 전시 예산의 일부가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두고 싶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전시에 대한 나의 호오(好惡)의 판단은 독립적이다.

‘전시’에 관련한 텍스트를 번역하는 건 종종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 일이다. 물리적인 공간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될 전시 텍스트를 잘 번역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없는 전시를 마음껏 상상해야만 한다. 물론 텍스트만 보고 멋대로 상상하는 건 아니다. 이미 완성된 결과물이 있다면 이미지나 영상을 미리 보기도 하고, 과거에 만들어진 것을 바탕으로 전시에서 구현될 작업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전시 공간에서 펼쳐질 작업을 다루는 텍스트를 적절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전시를 어느 정도 그릴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종종 여러 감각을 향해 공감각적으로 뻗어 나가거나, 텍스트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틈을 잔뜩 집어두고 관람객을 기다리는 전시들이 있다. 또한 그런 부분을 자신이 쓴 텍스트에서도 콕 집어 이야기하는 큐레이터가 있는가 하면, 두루뭉술하게 혹은 흥미로운 암시를 제안하듯 전시의 구조에 삽입된 틈과 구멍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큐레이터도 있다. 번역가의 입장에서만 보면, 좀 더 명확하게 작업할 수 있는 경우는 전자다. 하지만 관람객이나 동료 큐레이터, 비평가의 입장에서는 후자가 더 흥미롭다. 무엇보다, 2001년 첫 번째 전시를 개최한 후 10년 동안 공백기를 가지고 지난 2011년에서야 격년으로 꾸준히 열리기 시작한 ‘타이포잔치’가 항상 문자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오가며 여러 가지 문자 체계를 활용해 의미를 옮기는 번역가에게 타이포잔치는 즐겁지 아니할 이유가 없는 전시라 하겠다.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중앙홀 전경 © 글림워커스

소피 두알라, ‹검은 토끼를 따라› © 글림워커스

타이포 + 잔치 = 타이포그래피 × 전시 ≠ 오탈자 + 파티

2년에 한 번, 벌써 여덟 번째를 맞이한 타이포잔치는 누가, 무엇을 위해서 여는 전시일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DCF)과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공동 주관하고, 국립한글박물관과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협력하는 타이포잔치는 전 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로 옛 서울역 건물을 문화시설로 탈바꿈한 문화역서울 284를 주 무대 삼아 치른다. 지난 몇 차례, 비엔날레는 문자와 몸, 문자와 도시 등 문자와 ‘그것’을 둘러싼 관계를 주제로 삼았다. 전시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 전시와 얼핏 착각하기 쉽지만, 글자 혹은 문자의 배열을 뜻하는 ‘타이포그래피’를 출발점으로 삼는 본행사는 상당히 학구적이다. 전시장에 놓인 작업물을 그저 미술 작품 보듯 관람하는 대신, 일종의 시각적 선언문이나 연구를 해석하듯 바라보아야 할 이유다.

양위차오, ‹칠판 스크리보폰› 공연 © 글림워커스

손영은, ‹종이울음› 공연 © 글림워커스

한편, ‘타이포typo’와 ‘잔치janchi’는 하나로 모아 붙이기엔 조금 묘한 조합이다.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typo’라는 단어는 곧 오탈자(誤脫字)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타이포잔치typojanchi’는 ‘오탈자 파티’를 뜻하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이제 타이포잔치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기획 측에서 말하길, 세계에서 유일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라는 정체성은 참여 작가 섭외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글이라는 독특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열리는 행사는 분명 매력적인 제안일 테다.

헤르디마스 앙가라, ‹라숙› 공연 © 글림워커스

헤르디마스 앙가라, ‹라숙› 공연 © 글림워커스

현대미술이더라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는 얼핏 현대미술 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참여 작가가 작업을 선보이는 방식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미술적 문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요쎄 필의 ‹ㄴㅐ새ㅇ가ㄱ으ㄹ마ㅅ보ㄹㅅㅜ가어ㅂㅅ어›는 폐허를 재현한 조각적 설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근대 문화재이기도 한 옛 서울역사의 고풍스러운 공간에 놓인 잔해들은 이 전시에 ‘작가’로 참여한 요쎄 필이 각각의 잔해에 새긴 부조의 형상을 통해 (우리가 아는 언어로는 소리를 내 읽을 수 없는) 문장을 만들어 보여주는 결과다. 이를 두고 언어를 주제 삼은 현대미술 작품으로 볼지,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연구나 프레젠테이션에 가깝다고 판단할지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른 결로 다가설 것이다.

요쎄 필, ‹ㄴㅐ새ㅇ가ㄱ으ㄹ마ㅅ보ㄹㅅㅜ가어ㅂㅅ어› © 글림워커스

굳이,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가 미술 전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시가 만들어진 틀을 고려하며 바라보았을 때, 비엔날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싶다. 예컨대, 미술가 조혜진의 ‹이주하는 서체›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이주민들의 손 글씨를 토대로 만든 한글 서체를 배포하며 우리가 당연시하는 활자 꼴의 형태가 누군가에게는 위계로 작용할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작업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서체와 해당 서체가 만들어진 과정 및 그 일부를 출력해 벽면에 배치한 작업을 타이포잔치에서 마주하는 일은 현대미술 전시에서 동일한 작업을 마주쳤을 때와 확연히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작가는 다섯 명의 이주민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의 꼴과 획을 부조 형태로 확대해 바닥에 배치하고, ‹다섯 개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선보인다. 그간 조혜진의 작품은 주로 소외된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현대미술 전시에서 만날 수 있었다.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에서 그의 작업은 활자 꼴의 이면에 대한 코멘트로 재배치된다.

조혜진, ‹이주하는 서체›, ‹다섯 개의 바다› © 글림워커스

글자와 소리의 틈과 사이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에서 현대미술 전시에서 만났던 작가 혹은 작품을 다시 만난다면, 앞서 언급한 두 작품처럼 관점을 살짝 비틀어서 바라보기를 권한다. 타이포그래피가 주인공인 이번 전시가 계속 어디선가 마주친 적 있는 현대미술 전시처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타이포그래피, 글자, 혹은 문자를 중심으로 만든 전시가 왜 미술 전시처럼 보이는 걸까?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기획팀이 제안하는 전시의 방향에 따르면, 전시는 문자와 소리에 집중하면서 타이포그래피를 경유하여 서로 다른 감각을 ‘교차’하고 ‘차이’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잘 맞아떨어지는 화음보다 불협화음에 가깝고, 꽉 짜인 틀보다는 즉흥적 호흡을 따르는 쪽에 가깝다.

양위차오, ‹칠판 스크리보폰› © 글림워커스

우리에게 고정된 틀을 잠시 벗어나 틈과 사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권하는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에서 현대미술 전시의 기시감을 느낀다면, 그건 단지 전시장에 놓인 작업물들이 미술작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닐 테다. 실제로 이 전시가 말하는 바는 많은 현대미술 전시에서 접하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를 보고서 그리 머지않은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진행 중인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까지 함께 관람하길 권한다. (타이포잔치와는 조금 다르게) ‘지도’를 열쇳말 삼은 본격 현대미술 전시인 올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탈영토적’ 사유를 강조하는데, 그중에는 (마치 올해 타이포잔치처럼) ‘말’과 ‘소리’를 다룬 부분들이 있다. 두 전시를 함께 보면서 비슷하지만 다른 점을 천천히 음미해 보아도 좋겠다.

이수지, ‹콤포지션› © 글림워커스

요코야마 유이치, ‹광장› © 글림워커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때때로 ‘글자들의 잔치’라고 불리는 타이포잔치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활자 혹은 글자의 배열을 뜻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가 아닐지라도 실은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금 휴대폰이나 컴퓨터 화면으로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 눈 앞에 펼쳐진 글자들의 배열 또한 타이포그래피의 하나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문화역서울284 1층과 2층에 배치한 작품으로 이뤄진 전시 전체를 어떤 문장이나 글자, 단어의 배열을 보고 듣는 것처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더불어 이 건물이 우리에게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라는 말을 건네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말인지도 상상해 보자.

(정답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나는 이 전시가 고막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마치 귓가에 들리는 대사가 없는 무용처럼 말한다고 느낀다. 전시장에 들린다면, 공간에 놓인 가벽과 구조물을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모든 구조물은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거나, 구멍을 뚫어 고정하는 대신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 물리적으로 무엇 하나 고정되지 않고 기대고 붙잡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인데, 이런 태도는 전시 전반을 꿰뚫고 있다. 결국 이번 전시는 무엇 하나 고정되지 않고 조금씩 틈을 내어 벌어져 있다. 전시의 모든 것이 따옴표를 두른 잠정적인 대상이 되면서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슬라브와 타타르, ‹사랑의 편지 1, 2, 3, 8, 9번› © 글림워커스

그러니 타이포잔치 전시에 방문한다면 의미에 대한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전시가 건네는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모든 것에 정답을 내놓아야 하는 답답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새 혹은 사이에 놓인 이 공간은 애석하게도 아주 짧은 기간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사라진다.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는 10월 14일까지 존재할 예정이다. 그리고 2년 뒤인 2025년에야 다른 이야기와 함께 돌아올 테다. 그러니 따옴표 사이의 것들을 보려는 이는 너무 늦기 전에 들리길 권한다. 

에릭 티머시 칼슨, ‹ETC×본 이베어: 10년간의 예술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 글림워커스

Exhibition

타이포잔치 2023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기간: 2023. 09. 19 – 2023. 10. 14

참여작가: 강문식, 김뉘연·전용완, 내트 파이퍼, 럭키 드래건스, 마니따 송쓰음, 머티 인도 고전 총서, 문정주, 박고은, 박철희, 새로운 질서 그 후, 소피 두알라, 손영은, 슬라브와 타타르, 신도시, 신동혁, 아스트리트 제메, 야노 케이지, 양위차오, 양으뜸, 에릭 티머시 칼슨, 에즈키엘 아키노, 오케이오케이 서비스, 요쎄 필, 요코야마 유이치, 이동언, 이수성, 이수지, 이윤정, 이정명, 이한범, ㅈㅈㅈㅈ 제롬 엘리스, 조혜진, 조효준, 크리스 로, 크사베리 키르클레프스키, 타이거 딩선, 티슈오피스, 헤르디마스 앙가라, 『그래픽』 50호 (가나다 순)

Place

문화역서울284: 서울 중구 통일로 1

Writer

박재용은 주로 한국 서울에서 활동하는 필자, 통·번역가, 큐레이터다. 장서광으로, 동시대 미술과 이론 서가인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에서 허영균과 함께 프론트맨으로 활동하고, 정성은, 김수지와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인 ‘서촌코미디클럽’(@westvilalgecomedyclub)을 운영한다. 

틴팝에서 보다 확실한 팝스타로

Review

Review

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1915만에 달하는 K팝 아티스트 전소미가 지난 8월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태권도 품새(그는 태권도 공인 4단입니다!)와 테크토닉이 나오는 타이틀곡 ‘Fast Forward’도 계속 화제인데요. 알고 보니, 이번 앨범은 회전율 빠르기로 유명한 K팝 업계에서 이례적으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 같은 새소식이더군요. 대중음악 평론가 블럭 님이 전소미의 신보 ‹GAME PLAN›에 대한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아티클에서 지금 확인해 보세요.

아티스트의 긴 공백을 짧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공백 전 작품의 임팩트가 길고, 공백 후 작품이 가진 힘이 크면 된다. 그런 점에서 전소미의 활동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빠르면 3개월, 길어도 1년 여의 시간이 지나기 전에 어떻게든 작품이 나오는 요즘 시대에 전소미는 2년 가까운 긴 공백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잊히기는커녕 오히려 강한 인상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성장을 증명했다. 전소미의 솔로 아티스트 활동은 짧은 편이다. 더블랙레이블에 합류해 2019년 첫 싱글을 냈으니 햇수로는 올해가 겨우 5년 차다. 하지만 2016년 ‹프로듀스 101›에 참가한 후 아이오아이 멤버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이에게 ‘전소미’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고, (어릴 때의 TV 출연들은 차치하더라도) 갓 중학생이 된 신분으로 JYP의 신규 걸그룹 TWICE 제작 프로그램인 ‹SIXTEEN›에 참여했던 201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실질적인 커리어는 8년 차에 접어든다. 솔로 아티스트로서 2019년 첫 싱글을, 2021년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 전소미는 (저마다의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DUMB DUMB’에서 ‘XOXO’로 이어지며 북미 감성의 틴팝을 재현이 아닌 체화로 선보인 퍼포먼스로 연신 감탄을 내뱉게 했고, 그런 부분이 결국 이번 앨범 ‹GAME PLAN›의 타이틀곡 ‘Fast Forward’의 성공에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DUMB DUMB› 커버

‹XOXO› 커버

‘DUMB DUMB’, ‘XOXO’ 등 과거 두 곡이 지닌 틴팝 스타일은 단순히 정체성 때문에, 혹은 외모 때문에 손쉽게 택한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Fast Forward’ MV에서의 태권도 품새가 우습지 않고 멋지다고 느끼는 요인을 고민해 보면 결국 전소미는 전소미이지, 특정한 몇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K팝 산업에서 이토록 입체적이고 다각도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중 특정 콘셉트나 세계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볼 때 전소미는 가장 드문 케이스 중 하나다. 물론 전소미 혼자 이 모든 걸 오롯이 구축하진 않았다. 소위 말하는 ‘테디 사운드’를 통해, EDM-힙합-알앤비 사이에서 절묘한 중점을 이루며 심플하고 탄탄한 곡을 오랫동안 써온 프로듀서 테디와 그의 동료들에게도 공을 돌려야 마땅하다. 다만 전소미는 단순히 곡을 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에 직접 관여하고 책임지며, 또한 표현했다. 데뷔 싱글 이후 지금까지 작사와 작곡에 직접 참여한 그의 곡 중 ‘Watermelon’이나 ‘어질어질(Outta My head)’ 등을 살펴보면 팝 알앤비에 가까운 형태를 일관성 있게 만날 수 있고, 이런 부분은 ‹GAME PLAN›의 수록곡 ‘자두’에서도 잘 드러난다. 후술하겠지만, ‘자두’는 앞선 두 곡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으며. 잘 정리된 형태는 물론 명확한 무드를 지닌다는 점에서 곡을 쓰는 전소미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GAME PLAN› 커버

이번 글의 본론인 ‹GAME PLAN›에 관해 얘기해 보자. 앨범은 ‘금금금’으로 시작한다. 자기 과시가 재치 있게 등장하는 이 곡은 아무래도 힙합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표현으로 가득한 가사와 이를 잘 담아낸 트랙의 모양새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캐치한 비트, 센스 있는 가사에 비해 곡의 모양새가 엄청나게 특별하진 않다. 하지만 곡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전소미의 랩 퍼포먼스는 분명 인상적이다. 최근 K팝에서 랩이라는 포지션은 사라지는 추세다. 물론 랩을 음악적 정체성의 기반으로 잡고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거나,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직접 가사를 쓰고 랩을 하는 방식을 통해 특정 멤버가 전문적으로 랩을 대하는 경우는 꾸준히 관찰된다. 하지만 그룹 내에서 래퍼라는 역할은 가끔 불필요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실제 많은 곡에서 랩이 사라지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솔로 아티스트가 이렇게 곡 하나를 투자해 랩을 선보이는 행위는, 특히 보컬을 메인으로 하는 아티스트가 이렇게 풀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감상을 제공한다. 한사민 감독이 제작한 MV는 최근 힙합 MV에 사용되는 문법에 감독 특유의 스케일 활용과 뚜렷한 색감을 더하면서 곡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다음에 등장하는 곡이 바로 타이틀곡, ‘Fast Forward’다. 전체적으로 2000년대 유럽 팝 음악의 색채가 언뜻 보이면서도 최근 EDM 팝의 방향성도 함께 느껴진다. 랩과 보컬, 이펙트가 K팝 특유의 구성과 직결되어 짧은 러닝타임 중 트랙과 퍼포먼스가 계속 변한다. 후렴이 지닌 힘이 워낙 강한 이 곡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유려한 탑라인(보컬이 부르는 영역) 아닐지 싶다. 세련된 탑라인은 곡의 퀄리티를 끌어 올리며 어느 한 구간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차 있다. 과감한 시도를 가미한 MV 역시 태권도 퍼포먼스로 대표되는 비주얼과 더불어 전소미라는 인물의 성장 여정, 성숙함과 세련미로 제련한 현재 앨범과 과거에 발표한 정규 앨범의 연결성을 자연스럽게 한데 모아 놓는다. 그래서 긴 공백이 느껴지지 않도록 그 간극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가 하면, 전소미라는 사람의 성장과 성숙을 자연스럽게 곡과 콘셉트로 이어간다. 테크토닉 또한 그 자체로도 파장을 일으켰지만, 높은 밀도의 작업을 이끄는데 테크토닉이라는 하나의 킥이 정확한 효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챌린지를 위한 챌린지가 아니라 좀 더 많은 이의 도전 의식을 부르는, 말 그대로 챌린저블한 안무를 통해 곡의 접근성도 자연스럽게 높였다.

두 곡의 존재감이 강하다 해서 남은 세 곡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테디 사운드의 연장선에 있지만 좀 더 직설적이고 요즘 팝의 모양새를 강하게 풍기는 ‘개별로’는 최근 몇 년간 북미에서 팝 음악으로 사랑받은 신인급 여성 솔로 아티스트의 곡들과 동일 선상에 놓아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아티스트와 비슷한 나이 또래라면 훨씬 더 공감하며 즐기지 않을까 싶다. 그런 감성은 ‘자두’에서 훨씬 더 크게 드러난다. 가사 속 표현은 싱어송라이터 전소미의 감성을 더없이 잘 대변한다. 모순적인 듯하면서도 결국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더욱 많은 또래에게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 곡 ‘The Way’는 어쩌면 ‘XOXO’부터 꾸준히 이어진,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북미 팝 음악 느낌이 더욱 도드라지는 케이스로 아티스트에게 가장 잘 맞는 옷 중 하나다. 무엇보다 전소미의 보컬이 굉장히 세련되고 밋밋하게 들리지 않아서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매끄러우면서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총 다섯 곡을 수록한 이번 EP는 아티스트 전소미의 방향성을 드러내기에 그 의미가 깊다.

음악 외적으로, 전소미는 많은 일을 병행하는 존재다. 뮤지션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광고 모델부터 예능 프로그램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한다. 아직 나이가 충분히 어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조급하게 활동하기보다 자기 개성을 선보이는 길을 모색하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전소미의 이번 앨범은 면밀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K팝의 색채를 유지한 아티스트의 길을 걸으면서도,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유연하게 존재하는 전소미의 가치를 자연스레 담아낸 산물이니 말이다.

© DAZED KOREA

Artist

블럭(@bluc___)은 프리랜서다. 서울숲재즈페스티벌 관련 일을 하고, KBS 쿨FM ‹스테이션Z›에서 대중음악 평론가 김윤하와 함께 일요일 디제이를 맡고 있으며, 추계예술대학교 영상비즈니스학과에서 강의하고,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비석세스부터 주한프랑스대사관까지 클라이언트도 다양하며, 네이버 디자인 객원기자, 월간 «재즈피플»과 «믹스맥 코리아» 필자 등 별거 다 하고 있다.

있을 때 잘할걸: MMCA 서울관

Review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뇌를 끊임없이 부유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에헤이~ 조졌네 이거.” 시골에서 농작물 먹방 ASMR을 진행하시는 유튜버 ‘순자엄마’는 자신의 생방송을 방해하는 꼬꼬댁 닭의 존재를 참지 못해 결국 손수 백숙으로 ‘진행’시킨다. 그러다 가마솥에서 뽀얀 닭을 꺼내는 순간 흙바닥에 철퍽하는데, 이때 나오는 찐텐의 반응이 바로 “에헤이 조졌네 이거.” 유튜브 쇼츠에서 무한 반복된 덕분인지 알 사람은 다 아는 밈으로 등극했다.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렇다. “에헤이~이번 리뷰 조졌네 이거.”

관람한 전시에 대한 저격은 결코 아니다. 아니, 일단 저격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나는 전시를 보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전시 사진을 포토그래퍼에게 의뢰해서 보정까지 다 끝내놓고, 룰라랄라 나만 리뷰를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난 주말 MMCA 서울관에 방문하려고 했는데 해당 전시가 이미 끝났다는 참혹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한 주만 있다 가자, 조금만 있다 가자, 질질 끌던 바로 그때가 막차였던 것이다. 이미 떠나버린 전시의 이름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5월 26일 개막해 7월 16일에 끝났다. 약간 의아한 지점은 있다. 보통 MMCA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는 적어도 3개월, 길면 6개월이 넘는 장기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데 시작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철수했으니, 게으른 내 관람 시계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한 것이다. 아, 이렇게까지 말하는 심정이 매우 구차하여 다시 한번 외쳐본다. “에헤이 조졌네 이거.”

사실 이번 전시는 기대를 많이 한 전시였다. 뉴욕에 위치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과 공동으로 기획해 한국 실험미술 초창기를 집대성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인 1960-70년대는 군사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개발독재 정권이 북한과의 이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때를 보릿고개 탈출, 부국강병, 수출보국을 외치며 대한민국 전체가 꿈틀대던 시기로 기억하지만, 사실 당시 국제 사회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6.8 혁명,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반전 평화 운동, 페미니즘, 제3세계 문제 등 인식 면에서 첨예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마치 갈라파고스섬처럼 독재 정권 아래서 오직 경제 부흥에만 집중하던 상황에서 동시대적 실험미술이 꿈틀거렸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9명의 작가가 제작한 99점의 작품과 31점의 아카이브 자료로 구성한 이번 전시는 오는 9월 1일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다시 개막한다. 날짜를 보니 작품 운송과 전시 준비 때문에 생각보다 빠르게 떠난 것 같다. 한국에서는 소소한 교통비와 티켓비로 즐길 수 있는 전시를 다시 영접하려면 저 멀리 뉴욕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뒤집히고, 후회막심이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라’는 명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곁에 있는 존재감이 자연스러워서 그 귀중함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던가. 이는 언제나 우리를 환대하는 전시, 행사뿐 아니라 친구, 연인, 가족 등 인간관계와 각종 애착 물건에도 모두 통용되는 법칙이다. 있을 때 잘할걸! 후회를 남발하지 않는 삶을 위해 우리 주변의 당연한 것들에 좀 더 관심을 쏟길 기원한다. 일단 나 자신부터 시작이다.  

Exhibition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기간: 2023. 05. 26 – 2023. 07. 16

Place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Artist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박도현(@dhyvnpark)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사진 기술자다. 렌즈 기반의 ‘좋은 이미지’ 제작을 지향한다.

보아라, 결국 파국이다: MMCA 과천관

Review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갔다. 마지막 발길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다. 날씨는 좋았고, 기대감은 커졌다. 순수예술과 건축, 디자인은 서로의 방법론을 차용하며 경계를 허물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미술관을 장악하는 주체는 정해져 있다. 클라이언트 잡을 기반으로 자신의 창작관을 조금씩 확장하는 건축과 디자인은 창작 동력이 온전히 창작자 개인에 쏠려있지 않다는 점에서 미술관 무대에 진입하기까지 수많은 반대와 색안경을 견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명실공히 국내를 대표하는 신진 예술가의 등용문인 «젊은 모색»이 2021년 40주년 특별전을 치른 후 첫 번째 여는 전시의 주인공으로 건축, 디자인 장르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을 환대했다는 점은 가슴 떨리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 2전시실, 중앙홀에 배치한 13명(팀)의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니 2시간 남짓이 흘렀다. 전시를 보는 내내 주화입마에 걸릴까봐 마인드 컨트롤이 필수였다. 분노와 짜증, 안타까움과 후회가 복잡하게 얽혀 온몸의 혈관을 답답하게 누르는 느낌은 전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섹션에 박아놓은 설명, 실견하는 작품, 오디오 가이드와 브로슈어로 획득한 정보가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계속 끊어지는 상태에 대한 일종의 신체적인 자동 반사였다. 전시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질문의 답을 끝끝내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과연 이 전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젊은 모색»의 장점 중 하나가 독립성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21년이나 2010년대 열린 «젊은 모색» 전시를 보면 이름이 아주 깔끔하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젊은 모색’이다. 즉 공통된 주제로 창작자를 몰아세우기보다 자기가 천착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작업으로 소신을 보여주는 자유로움을 보장한다. 이는 신진 예술가의 등용문으로 기능하는 핵심 지점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미술관에 대한 주석’이란 부제를 붙이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주제이자 소재로 정해놓았다. 그들에게 특정 주제를 던지고 커미션 워크를 요청하는 방식은 «젊은 모색»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태도와 큰 거리감이 있다. 젊은 작가의 개성과 신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은 작가에게 모든 걸 위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참여자는 최상이 아닌 최선의 결과물을 내는 게 미덕인 건축, 디자인 필드에서 비범한 성취를 보여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특정 주제와 소재를 제시하고 조형적인 해석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는 그들이 지금껏 이룩한 합리적인 톨레랑스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즉,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뜻이다.

요목조목 따져보자. 만일 건축, 디자인 쪽 창작자가 지닌 해석의 다양성을 손쉽게 끌어내고 싶어서 미술관을 선택한 거라면, 소재가 잘못됐다. 수많은 미술관 중에 왜 하필이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인가? 위치와 조형 요소, 구조가 명확하게 가시화된 미술관을 위해 주석을 달아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존재하는가? 전시 기획 방향이 그렇기에 따라야 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이다. 정 필요한 기획이었으면 «과천관을 위한 주석»이란 전시로 따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젊은 모색»이란 타이틀 아래 “전시 제목의 ‘젊은’만큼 ‘모색’에도 집중한다”는 기획의 글은 난센스다. 실상 과천관을 모색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석을 다는 대상이 굉장히 편협하다.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미술관을 살짝 다루는 듯싶다가도 결국 주인공은 과천관 및 전시가 열리는 1, 2 전시실이며, 과천관에 대한 정보를 폭넓게 해석하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1, 2 전시실에 머문다. 1, 2 전시실이 작업 대부분의 요람이 되어야 하는 정당성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전시실에 기둥이 많다는 이유로 떠오른 기둥의 존재가 작가 세 명이 천착할 가치를 지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1, 2 전시실에서 열렸던 200개의 전시 중 36개밖에 남지 않은 도면 ‘아카이브’ ― 아카이브라고 부를 수 없는 비루한 자료 ― 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행위가 정말 전시에 대한 주석을 다는 작업인지 헷갈린다. 과천관에서 열린 주요 전시 포스터를 해체해 재구성한 작업의 밑바탕은 왜 1, 2전시실 전시가 대부분을 차지하는지, 과거 열린 전시의 평면도와 투시도를 재활용했다는 설치 작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왜 과천관의 평면도와 투시도만 나타나고, 전시 도면이라고는 이번 «젊은 모색» 하나만 출현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작가의 작업실과 과천관까지의 이동 경로와 풍경, 경계를 다룬 작업을 보면서 정작 작업실 위치가 어딘지 몰라 전혀 몰입되지 않는 게 나 혼자뿐인지, 미술관과 관객이 관계 맺는 지형지물을 상상한다면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과천관의 공간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에 답답함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인지 정녕 모르겠다.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드는 지점은 여러 텍스트와 작품 제목, 작품 설명에서 보이는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제도 공간”이라고 과천관을 정의하는가 하면, 과천관의 물리적인 특징과 공간의 리듬을 종교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특성으로 격상시켜 특정 공간을 예배당으로 치환하거나, 미술관의 버려진 계단으로 접근하는 길을 제단으로 명명하며 “신성한 기운”을 운운한다. 이미 동시대적 흐름에서 소멸해 버린 미술관의 권위와 신비감을 좀비처럼 되살리는 자기 위안적 흑마법은 모두를 과거로 퇴행시킨다. «젊은 모색»이란 ‘젊은’ 전시가 과천관을 신성시하는 제물로 바쳐지는 광경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이쯤 되면 작가들은 얼떨결에 어용 전시에 부역하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관객을 우롱하는 타의적 공범과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건축과 디자인을 사랑하고 이쪽에서 활약하는 창작자를 존중하지만, 이번 «젊은 모색»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작업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 실망스럽다. 주석을 달려면 원문이 필요하고, 이때 원문은 그 무엇보다 명확하고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이 달아놓은 주석은 뿌리를 이루는 원문부터 마구 흔들거린다. 영점 조절 없이 쏘는 총처럼 불안하고, 초점이 계속 바뀌어 어지러움을 선사한다. 거의 정신 분열적인 결과다. 전시실 출구 쪽에 비치한 관객이 메모를 남기는 섹션에는 ‘어렵다’, ‘지루하다’, ‘알 수 없다’란 말이 자주 보였다. 이런 말이 21세기 전시에서 가장 기피한다는 사실은 다들 알 것이다. 재미있지만 어려운 전시는 존재해도, 어려워서 재미있는 전시는 없다. 이런 이해 불가능이 심오한 철학적 세계를 탐구하는 데 드는 심적, 지적인 무게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작업과 이를 둘러싼 여러 레토릭 ― 심지어 이마저 혼자 논다! ― 의 향연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둥을 가리지 않고 가벽을 최소화한 덕분에 전체 풍광이 훤히 보이는 매력적인 씬으로 만족하기엔 우리 시간의 가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년 «젊은 모색»은 올해와는 다른 의미로 파격적이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길 기대해 본다.

Exhibition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기간: 2023. 04. 27 – 2023. 09. 10

Place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Admission

성인: 2000원

대학생, 예술인 패스: 무료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박도현(@dhyvnpark)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사진 기술자이다. 주로 렌즈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를 제작하며, ‘좋은 이미지 제작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