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설명서: 30년 전 ‘그 전시’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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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그 두 번째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작년 처음 시작할 때, 마치 올림픽 같은 대규모 국제행사를 유치한 듯 모두가 기뻐하던 (이상한) 광경이 눈에 선한데요. 현대미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소중한 가이드, 박재용 님의 시선은 프리즈 서울을 넘어 멀고 먼 30년 전을 바라봤답니다. 그때 우리 조상님(?)은 미국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를 한국에 들여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나더 스케일’의 사고방식과 주체적인 태도로 급진적인 국제 미술 행사를 통째로 수입한 것인데요. 30년을 돌고 도는 묘한 데자뷔(Déjà Vu)에 관한 박재용 님의 단상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전시에 출품한 작품 150여 점에서 그림은 10점도 채 되지 않았고, 참여 작가 82명 중에서도 회화 작가라 부를 만 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 게다가 그중 32명은 여성이었고, 유색 인종은 30명, 백인 남성은 1/3에 불과했다. 다수의 퀴어, 페미니스트 작가가 참여했으니 그야말로 ‘문화 다양성 잔치’라 할만했다. 더불어 꽤나 ‘젊은’ 전시이기도 했는데, 가장 어린 작가는 20살! 작가의 70%가 2030이었다. 82명 중 60명가량이 사실상 여기에서 미술계에 데뷔했다. 심지어 아티스트로 활동한 적도 없는 배관공이 캠코더로 촬영한 사건 현장의 기록 영상을 전시장에 놓으며,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이렇게 묘사했다. “미디어 아트를 공공 예술 형식으로 재정의하며, 다큐멘터리의 정의를 확장한다.” 요즘 종종 마주치는 국제 기획전이나 비엔날레의 풍경이 떠오르는 이 전시는 사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3년 3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열렸다. 최근 몇십 년의 미술사에서 잊을 만하면 소환돼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문제적 전시의 이름은 바로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뉴욕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에서 주관하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67번째 행사였다.

“김영삼 대통령 내일 세계화 회견”. 1995년 1월 5일 KBS 9시 뉴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브로슈어. 종일 진행한 작가와의 대화를 위해 점심 도시락 지참을 권하는 문구를 실었다. © 국립현대미술관

그해 휘트니 비엔날레를 관람한 많은 평론가는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일단 회화 작품의 부재가 여러 사람의 신경을 거슬렀다. 미술 전시에 그림이 없다니! “나는 이 전시가 싫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가 있었는가 하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징징거림의 향연”이라는 말도 돌았다. 비엔날레가 열리기 직전인 1993년 1월 말,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제4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어떤 사람은 인종과 정체성이 다양한 비엔날레의 작가 구성을 두고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을 강조하며 인종과 성비를 맞춘 클린턴의 “진짜 미국처럼 보이는 내각(a government that looks like America)”처럼 보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 화답할 준비라도 한 듯,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백인 여성 둘, 백인 남성 하나, 흑인 여성 한 명이 큐레이팅을 맡았다. 특이사항은 여러모로 더 있었다. (이 글을 작성하는 2023년에는 흔한 ‘공식’처럼 자리 잡은 느낌이지만) 이 전시는 미술관 외부에서 큐레이터를 초빙하는 모험(!)을 했고, 도록 필자로는 (탈식민주의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호미 K. 바바Homi K. Bhabha 등 큐레이터가 아닌 학자, 연구자 등을 초빙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고, 심지어 갓 관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A. 로스David A. Ross는 비엔날레 도록 첫 글에 ‘Know thyself (know your place)’이란 야심 찬 제목을 붙였다. 마치 주요 관람객인 미국인을 향해 ‘너 자신을 알고, 네가 처한 곳을 알라’고 말하듯 말이다.

1937년 휘트니 미술관의 연례 ‘미국 미술’ 전시로 시작해 1973년부터 격년으로 열리는 비엔날레 형식으로 전환한 휘트니 비엔날레가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렇게나 ‘미국적이었던’ 순간은 없었다. 사실 휘트니 비엔날레는 그 역사가 거의 60년에 이른 1993년까지도 ‘미국의 미술’을 보여준다는 목적에 대해 그다지 깊은 고민을 거의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술을 주도하는 주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의 찬란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생각해 보자. 유럽 미술에 대한 미국 미술의 승리를 보여주는 증거 혹은 미술의 최종 진화 단계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지던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아티스트에게 도무지 낄 자리를 주지 않았다. 백인 남성이라는 정체성에 들어맞지 않는 아티스트는 심지어 추상적인 작품을 그리더라도 흑인 정체성이나 여성과는 관련 없이 (백인 남성에게는 누구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은) 보편성에 호소하는 작품이라고 항변해야만 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과 정체성으로 부글부글 끓어 넘칠 것 같지만 백인, 남성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미국을 사람들은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불렀다.

«Guerilla Girls Review the Whitney» (1987, The Clocktower, New York) 전시 출품작.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의 젠더 불균형을 도표로 시각화했다.

1992년 일어난 LA 폭동은 이런 ‘용광로’에서 쇳물이 넘치며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문화 다양성’을 의제로 삼은 클린턴 정부는 이런 맥락에서 임기를 시작했고 (클린턴은 연임에 성공하며 총 8년간 재임했다), 전에 본 적 없던 (그래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역시 당대 사회 분위기를 바탕으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정체성의 작가들을 보여주기 위해 꽤 노력했고, 설치와 영상 등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나 자주 보이지 않던 형식의 작품을 많이 포함했다. 심지어 ‘미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토론이 필요한 대상까지 작품으로 제시했다. 시카고에서 배관공으로 일하던 죠지 홀리데이George Holliday가 한밤중에 들린 소란스러운 헬리콥터 소리로 잠에서 깨어 홈비디오를 찍듯 창밖 광경을 촬영한 10분 길이의 영상을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비디오 테이프(George Holliday’s Video Tape of Rodney King Beating)›(1991)이라는 제목의 ‘미디어 아트’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비엔날레에 “그림이 없다”고 불평한 평론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현대미술을 보는 관람객이 앞으로 수없이 마주할 ‘동시대적’ 미술 전시의 방향과 형식을 예고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의 K타운에서 일어난 폭동을 회고하는 2019년의 MBC 뉴스. 1991년 과속으로 적발된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 로드니킹을 LA 경찰 소속 백인 경찰관 네 명이 집단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이듬해 무죄를 선고 받자 촉발한 이 폭동으로 63명이 목숨을 잃고 2400여 명이 다쳤으며, 1만 2000명이 넘는 시민이 체포되었다.

수면 아래서 끓어오르던 작가들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이며 ‘가장 많이 비난받았고 동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시로 남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는 (전시가 열린 미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반전이 있다. 폐막 직후인 1993년 7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현 과천관)에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제 80년이 넘은 휘트니 비엔날레 사상 해외로 전시를 옮겨 다시 치른 적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미국미술을 보여준다는 목적에서 시작한) 휘트니 비엔날레를 머나먼 한국 땅으로 가져와 선보인 걸까?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포스터. 가족 구성원 4명이 나체 상태로 손잡고 있는 찰스 레이Charles Ray의 ‹패밀리 로맨스Family Romance› 작품 이미지에서 성기와 유방을 절묘하게 가렸다.

“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기존의 것을 물어뜯고 소화할 수 있는 강한 이빨을 주고 싶다. 우리도 젊은 시절에는 노인네 말을 잘 안 들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폐해가 선생이 학파를 만들고 조수를 만들면 그 조수가 또 조수를 만들고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좋은 의미의 하극상이 없다. 그렇게 되면 예술에서는 발전이 없게 된다.” – «경향신문» 1993년 8월 25일 자 「나의 삶 나의 생각」 –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 “예술엔 「건전한 하극상」 필요„

휘트니 비엔날레의 한국행은 백남준(1932-2006)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진짜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에게 “강한 이빨”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백남준은 총 전시 예산 65만 달러(지금 화폐 가치로 약 10억 원) 중 15만 달러를 자기가 직접 부담했다. 그럼에도 예산 확보는 쉽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위 기관인 당시 문화체육부에서 ‘전시 수입’에는 예산 지원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예산 대부분은 포스터에서 이름이 보이는 협찬사의 도움에 크게 기댔다. 이런 대규모 기업 후원은 1993년 당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우리는 좀 더 전폭적인 기업의 미술관 전시 지원을 목격하는 중이다.) 한편, 65만 달러의 예산 중 전시를 한국으로 옮기는 데 쓰인 돈은 실제 30만 달러였다. 나머지 35만 달러는 휘트니 미술관에 지급하는 일종의 사례비로 쓰였다.

통역사로 보이는 직원과 데이비드 로스 휘트니 미술관장,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모습. 벽에는 김영삼 대통령 사진과 국정 과제를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민간인 출신 첫 번째 대통령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 권위주의 시대의 문화가 남아있는 걸 엿볼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휘트니 미술관은 전시의 원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직원을 급파했다. 안전 장비 없이 비계 위에 서 있는 한국인 남성 노동자, 1990년대 옷차림의 여성 큐레이터, 휘트니 미술관 백인 남성 직원의 뒷모습이 만드는 앙상블이 절묘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미국의 관람객과 평론가마저 혼란에 빠트린 논란의 전시는 어떻게 한국에 ‘직수입’될 수 있었을까? 그저 백남준이라는 걸출한 작가 한 명이 본인의 명성과 친분을 활용해 추진하기에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규모가 너무나 큰 전시였고, 오너가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립 미술관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큰 공공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시를 구성한 주체 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무엇보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휘트니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두 기관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장 두 명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휘트니 미술관장 데이비드 로스는 사상 최초로 휘트니 비엔날레를 수출하며 본국에서 치른 비엔날레 예산의 절반을 단번에 확보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그가 7년 뒤 아트선재센터에서 기획한 전시 «코리아메리카코리아»(2000)로 이어지기도 했다.
  •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한 임영방은 참여 작가가 거의 900명에 달해 학연, 지연, 인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게 불가능한 «현대미술초대전»을 폐지하는 등 미술관 쇄신에 힘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오랜 군사독재정권의 종식을 선선하며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원했고, 대전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가 열렸다. (대전 엑스포의 관람객 수는 조직위 추산 약 1400만명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짧은 기간에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국제적인 프로젝트 아니었을까.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의 퍼포먼스 ‹사람의 보살핌(Loving Care)›(1992)를 관람하는 오프닝 방문객들.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퍼포먼스 관람객의 모습은 그리 다를 바 없는 것 같지만, 두 손을 모으고 관람할 정도로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인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건전한 하극상”과 “강한 이빨”이라는 인상적인 비유를 남긴 백남준과 휘트니 미술관의 행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도맡은 이용우(1952-)가 이 전시를 통해 어떤 고민을 해결했는지 공식적으로 알 길은 없다. 혹여 수십 년에 걸친 기나긴 군사 독재가 끝나고 문화적으로 꿈틀대던 한국 문화예술계에 일대 혁신을 꿈꿨던 걸까? 불과 2년 후인 1995년 개막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최를 위한 조직위원회에서 이용우와 백남준은 각각 전시기획실장과 «정보예술(Info ART)» 전시 감독을 맡았다. 임영방 관장은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들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이었든,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미술계와 일반 관객에게 미친 영향이 실로 엄청났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한 달 남짓 진행한 이 전시에는 15만 4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관람객이 다녀갔다. 미술관에서 열린 이 색다른 ‘직수입’ 대관 전시는 동시대적 큐레이팅이 깊게 반영됐다는 측면에서 분명 대중이 보기에도 꽤나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전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뉴욕에서 백인 남성 평론가들이 내뱉은 불평과는 결이 달랐지만.) 임영방 관장은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유치했다는 이유로 꽤 오랫동안 문화 식민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술대학에서는 휘트니 전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고리타분한 수업 방식에 반기를 드는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만난 영상이나 설치, 퍼포먼스 작품들은 ‘조각-공예-서예’, ‘한국화-양화’로 장르를 나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매년 치루던 «현대미술초대전»에서 감히 접하기 힘든 ‘새로운 무엇’이었다. 심지어 이 전시를 관람한 작가 여럿이 뉴미디어 아트로 작업 방향을 돌렸다는 후문도 도시 전설처럼 전해진다. 필자 주변에는 당시 어린이 관람객으로 이 전시를 접한 후 ‘현대미술’을 창작하는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작가도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가득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사실상 처음으로 정치색 짙은 전시를 선보인 자리이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난 정치적인 미술은 이듬해 «민중미술 15년 : 1980~1994»(1994)를 통해 비로소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성한다.)

대중에 전시를 공개하기 바로 전날, 나체 상태로 성기를 노출한 마네킹 작업을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인 채 바라보는 오프닝 참석자들의 모습. 특히 왼쪽과 오른쪽 끝에 선 남성 관객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주목해보자.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한국 최초’ 기록을 여러 가지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일 40분 간격으로 오가는 셔틀버스를 사당역에서 운행했다. 인턴십과 도슨트 제도가 공식적으로 없던 당시, 이 전시를 위해 인턴을 채용하고, 미술 이론을 전공한 대학원생을 도슨트로 활용하기도 했다.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거액을 후원받은 결과인지, 전시 도록에는 총 세 페이지에 걸쳐 총천연색으로 후원사 광고를 실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의 유치와 진행 과정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시의 모체로 보이기도 한다. 미술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이 전시의 기대 효과로 클린턴 대통령의 전시 방문을 들기도 했는데, 이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특징 중 하나인 다소 과장된 홍보와 비슷한 감이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은 전시 개막에 앞서 7월 중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1993년 봄날의 뉴욕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와 이를 한국에서 선보인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동일한 전시로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아니오’일 것이다. 일단 전시장 상황부터 무척 달랐다. 휘트니 미술관은 맨해튼 어퍼 이스트에서 매디슨 애비뉴와 75번가가 교차하는 부산스러운 길모퉁이에 있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사당역에서 셔틀버스를 제공한다고 홍보해야 할 만큼 서울에서 접근성이 떨어졌다. 휘트니 미술관 입구 코앞에는 찰스 레이의 거대한 장난감 소방차를 덩그러니 놓을 수 있었지만, 과천관은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고서도 권위적인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입구가 나왔다. 미국에서의 휘트니 비엔날레가 ‘지금, 여기’를 외치겠다는 결기를 품었다면, 과천 휘트니 전시는 일상에서 유리된 먼 장소에서 치루는 특수한 행사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외국에서 온 대단하고 새로운, 하지만 뭔지 깊게는 알기 힘든 어떤 ‘볼거리’였달까.

찰스 레이, ‹Firetruck›, 1993. 장난감 소방차를 실물 크기로 확대한 이 거대한 설치 작업은 운송 문제로 인해 서울 전시에서 제외됐다. © Charles Ray. Courtesy of Matthew Marks Gallery.

무엇보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의 미국판 ‘원본’과 한국판 ‘번안본’ 전시는 참여 작가와 전시 작품에서 차이를 컸다. 뉴욕에서는 아티스트 82명의 작품 150점을 전시했지만, 한국에서는 아티스트 61명의 작품 107점을 전시했다. 참여 작가와 작품이 각각 25%, 33%가량 줄었다. 작가와 작품을 솎아낸 기준 역시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일단 운송 문제가 걸렸다. 뉴욕에서 전시를 마친 뒤 한 달을 갓 넘긴 시점에 머나먼 한국으로 전시를 그대로 가져가는 건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찰스 레이의 거대한 장난감 트럭 설치 작업 등은 결코 한국으로 가져올 수 없었을 게다. 전시 후원사인 아시아나 항공에서 작품 운송비를 대폭 할인해 주지 않았다면 작품 수가 더 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국민 정서상 보여주기 힘든 작업 또한 한국 전시에서 스리슬쩍 제외됐다.

예컨대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 위주로 구성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그나마 한국 관람객이 그 이름만 봐도 알아차릴 만한 거의 유일한 유명 작가였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의 강력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에서 셔먼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작가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의 도판으로 대신해도 충분할 듯싶다. (미국판 도록은 작가의 약력과 함께 바로 위의 도판을 수록했다.) 한국적인 정서를 고려해 제외한 작가나 작품은 인종이나 젠더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가 사랑을 나누는 네 쌍의 퀴어를 기록한 ‹나이트레이트 키스Niterate Kisses)›(1992)는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도록에 실렸으나 전시 안내 브로슈어에는 없다. 아마 도록 인쇄에 들어간 후 전시 오프닝 전에 상영을 황급히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신디 셔먼, ‹Untitled #264›, 1992.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이처럼 대폭적인 ‘현지화’ 과정을 거쳤지만, 전시 시작에 앞서 열린 언론 회견장에서 로스 관장은 “이 전시 주제가 동성애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는 동성애는 전시의 주제가 아니며, 정체성의 표현이라는 더 넓은 주제의 일부일 뿐이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첨예한 문제였던 인종과 젠더 정체성 등을 다루며 논란을 일으킨 작품들이 막상 같은 시각 한국의 관객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미지수다. 어떻게 번역해서 의미를 전달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작품은 전시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미술관 관람객에게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들어간 입장 배지를 나눠준 다니엘 마르티네즈의 작품이 그랬다. 이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생전 달아본 적 없는 입장 배지를 만들어야 하고, 영어 문구를 기가 막힌 센스로 국문으로 옮겨야 할 것이며,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문구가 왜 유의미한 것인지 설명하는 긴 글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전시 주최 측의 결정은… 해당 작가와 작품을 서울 전시에서 제외하는 것이었다.

다니엘 마르티네즈Daniel J. Martinez는 ‹뮤지엄 태그Museum Tag›라는 제목으로 휘트니 미술관 입장 배지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백인이 되고 싶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I CAN T IMAGINE EVER WANTING TO BE WHITE) 는 문장을 달고 미술관을 활보했다.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이 이런 작품을 봐야 할 만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다며 불쾌함을 표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Robert Projects, Los Angeles.

그러니까, 미국인조차 ‘이 많은 텍스트를 어떻게 다 읽어가며 작품을 보라는 것이냐’고 항의했던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애초부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이식’하기 쉽지 않은 전시였다. 오늘날 현대미술 전시를 보다가 작품도 텍스트 범벅,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도 길어서 힘들다 싶으면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이런 광경을 거의 처음 마주했을 관객을 한번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시의 한국판인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에는 ‘해석’을 위한 텍스트가 거의 전무했다. 이를테면, 길게는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자막을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어로 내용을 요약해 제공… 하지도 않았다.) 번역하기 난감한 여러 작품을 전시에서 제외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설적인 일인데, 일단 운송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거나 내용이나 맥락상 전시하기 어려운 작품과 달리, 영화의 경우 필름만 가져오면 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전시에 포함했던 건 아닐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잊기 힘든 오역이 출현하기도 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작품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미 더햄Jimmie Durham의 작품 ‹Chastity Belt›는 ‘정조대’가 아닌 ‘순수 벨트Sun-su belt’로 뒤바뀌었다. 누가 번역했는지 알 길 없는 이런 아찔한 오역은 전시 전반에 퍼져 있었다. 작품명 ‹무제›는 오역에서 쉽게 벗어난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이었다. 1000부 한정으로 발간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도록은, 그렇다면, 한국인 입장에서 도무지 어려운 작업을 편안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까? 미국판 도록과 한국판 도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호미 바바, 코코 푸스코Coco Fusco 등 미술관 외부의 이론가와 작가에게 요청해 수록한 글이 쏙 빠졌다는 것이다. 그 빈 자리에는 문화체육부 장관과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인사말, 한국 측 전시 조직을 맡은 미술평론가 이용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최태만, (아마도 미술관 최초의) 객원 큐레이터 김선정이 쓴 에세이가 들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텍스트’와 ‘의미’가 과다하다고 비판받은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 한국에 수입 혹은 이식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번역과 자막이 사라지면서 외려 순수하게 시각적인 결과물에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독과 오해를 증폭하며 정체성과 경계라는 첨예한 의제가 ‘동성애 전시’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작업을 접한 관람객은 환호했고 미술학도와 작가들은 기존의 수업을 거부하거나 작업 장르를 바꿀 만큼 신선한 자극을 얻었다. 휘트니 미술관은 한국에서 선보인 이 ‘복제판’ 전시에서 어떻게든 원본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러운) 해당 전시는 원래 의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1986년 개관 후 공간 협찬이나 다를 바 없는 전시로 프로그램의 일부를 채우던 국립현대미술관이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통해 군사정권 이후 진정 민주적으로 선출된 문민정부의 국정 과제인 ‘세계화’에 발맞추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전시를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에세이는 쏙 빼놓고 국문 도록을 만든 결정이 옳았는지 따지는 것도 별 의미 없다. 미국에서는 작품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는데, 굳이 한국 전시에서만 시각 예술, 비디오, 영화로 구분하며 작품을 선보인 사실도 그리 중요치 않다. 백남준이라는 독특한 작가의 진의를 알 수 없는 욕망이나 이용우라는 탁월한 조력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이 전시를 한국에 왜 굳이 들여오려 했는지, 그리고 목적을 실현했는지는 큰 상관이 없다. 1993년 여름 15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 생전 본 적 없는 종류의 ‘현대미술’을 두 눈으로 보며 적절한 번역이나 해설이 없는 상태로 자기만의 오해를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점이 우리에게 남은 팩트니까.

‘원본성’ 유지를 위해 한국까지 온 휘트니 미술관 직원들. ©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열린 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러운’ 상황을 목도 중이다. 기록에 남은 몇몇 개인이 주요 플레이어가 되어 혁신을 시도했던 30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당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기 위해 미술계마저 ‘세계화’를 외쳤다면, 지금은 주변 국가의 정치적 변화와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지위 상승,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 흘러넘친 유동 자산이 갈 곳을 찾는 가운데 다시 한번 맞이한 미술 시장의 호황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정조대’를 ‘순수 벨트’로 오역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겠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한국에 직수입되었을 때보다 더 복잡한 오해와 오역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K팝처럼) 외부에서 수용한 새로운 것에 대한 오해와 오역, 그로 인한 파괴적 창조(?)야말로 한국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유치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 번외 격으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경계’에 관한 전시를 열 명의 한국 작가와 함께 진행하길 제안했지만, 전시의 원본성을 지키고 싶었던 휘트니 미술관은 차갑게 거절했다. 그런데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조직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이들은 다시 한번 모여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열었다. 당돌하게도 전시 주제는 ‘경계를 넘어’였고, 한국 작가 열 명이 아니라 전 세계 49개국에서 초청한 87명의 작가를 선보였다. 인종과 젠더처럼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가 다룬 정체성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핵심은 아니었다. 도리어 광주비엔날레는 “국가, 민족, 이념, 종교 등을 초월하여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계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미와 함께 예술을 포함한 각 개인의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한 창조적 세계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제안했다.

만약 이 글을 통해 «1993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소동을 처음 알게 되었다면, 혹시 바로 지금 한국 미술계 안팎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서 30년 전의 기시감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각자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오해와 오역이 난무하고 뜻하지 않은 창조적 파괴가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 한 가운데 서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창조란 때론 지독한 오역과 오독, 오해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추신

이번 글의 시각적인 완성도를 위해서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연구센터가 제공한 귀중한 사진 자료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예술연구센터에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센터 내 미술아카이브(@mmca_archive) 자료는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후 현장에서 직접 열람할 수 있다.

이 전시를 가장 순수하게 즐긴 주인공은 당시 한국의 어린이 관객이었을 것이다. 사진 속 두 어린이는 이날 어린이대공원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해 머물면서 난생처음 느끼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고, 나중에 커서 (동시대를 다루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2023년 현재 그들은 미술계와 더 넓은 동시대 예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늠름하고 당돌한 왼쪽 남자아이는 김다움 작가, 이지적인 눈빛의 오른쪽 어린이는 김보람 작가다. 사진 속 성인 여성은 그들에게 현대 미술의 세계를 열어준 두 사람의 어머니다. 사진 제공: 김다움(@daum_kim)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 (@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이 재미를 모르는 슬픈 사람들에게

Essay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글을 보내주는 김도훈 님의 이번 에세이는 다른 때보다 유달리 감칠맛이 납니다. SF 광인 인생 40년. SF 문학은 그의 삶과 미래의 방향타를 건든 일종의 거대한 흐름으로 작용했는데요. 언젠가부터 SF를 읽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를 멈추었던 그의 가슴은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신실한 간증 욕구로 차올랐어요. SF가 지닌 놀라운 힘과 더불어 글 마지막에 남긴 ‘뼛속 깊이 문과인 당신을 위한 SF 문학 10선’을 꼭 빠짐없이 확인해 보세요.

나는 울었다. 몰래 울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행정학원론』 책 뒤에 숨어서 울었다. 꺼이꺼이 울 수는 없었다. ‘행정학원론’ 강의 중이었다. 교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위 공무원이 되어 이런저런 중요한 행정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행정학과 출신이다. 행정학과는 5급 공무원 공개경쟁채용 시험, 그러니까 행정고시(行政考試)에 붙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한 친구들이 주로 들어간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남들 하는 정도로 하면 정년을 보장하며 연봉도 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들어간다. 아니다. 나는 지금 행정학을 멸시하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행정학원론 첫 수업부터 교수가 말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는 것이다. 교수는 대뜸 칠판에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단어부터 썼다.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는 공무원 집단의 무사안일을 비판하는데 자주 쓰인다. 교수는 말했다. “복지부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 고시에 붙은 친구들이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나는 행정학원론 강의 중에 ‘복지부동’하고 소설을 읽고 있었다. 아서 C. 클라크Arthur Charles Clarke가 1973년 발표한 『라마와의 랑데부(Rendezvous with Rama)』. 이 전설적인 소설의 무대는 22세기다. 50km가 넘는 길이의 원통형 외계 구조물이 태양계에 진입하고 사람들은 이를 ‘라마Rama’로 부른다.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발된 승무원들이 라마 내부로 진입해 구조를 조사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밝혀내는 것은 없다. 인간이 지닌 물리학 지식으로는 동력조차 설명할 수 없다. 결국 라마는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받자, 태양계를 떠나버린다. 라마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벅차올랐다. 인간이 인간 외의 존재와 랑데부를 하는 순간, 인간이 느낄 어마어마한 경이로움이 활자로 새겨져 있었다.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나는 라마에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라마에 있었다. 인간의 미래가 여기에 있는데 행정학원론 따위가 뭔 소용이람.

『라마와의 랑데부(Rendezvous with Rama)』아서 C. 클라크 지음,
박상준 옮김, 고려원미디어

그렇다고 내가 F를 받은 건 아니다. 행정학원론 시험 문제는 전반적으로 행정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러니까 행정에 대한 철학을 묻는 한 줄짜리 질문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강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온갖 영화나 문학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끌어와서 단편 소설에 가까운 소리를 시험지에 늘어놓고 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A를 받았다. 사실 나는 이때 눈치챈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허황된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맞다. 나는 허황된 글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내가 다닌 마산의 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로 시작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다만 1980년대 초반 치고는 설비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꽤 큰 동물들이 사는 동물원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도서관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치고는 공간도 넓고, 책도 많았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거기서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을 발견했다.

1970년대 발간한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은 소년·소녀를 위한 한국 최초의 SF 시리즈였다. 모두 60권으로 이루어진 전집은 19세기 말 SF를 개척한 쥘 베른Jules Verne,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과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고전으로부터 20세기 초 출판 장르로서의 SF를 확립한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 앨프리드 엘튼 밴보트Alfred Elton van Vogt, E. E. 스미스Edward Elmer Smith와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Edgar Rice Burroughs의 소설, 1950년대 이후 SF 황금기를 건설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로버트 A. 하인라인Robert Anson Heinlein, 아서 C. 클라크의 대표작을 모두 포함한, 정말이지 놀라운 물건이다. 지금의 나는 그 전집이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SF를 번역한 일본에서 구한 일본어판의 중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198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우리가 읽던 수많은 잡지 기사와 장르문학은 불법으로 일본어판을 중역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SF 불모지 한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SF 고전을 소개한 출판사에 무한한 우주의 규모만큼 거대한 존경을 보내고 싶어질 따름이다.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 1970

아이디어회관 세계 SF 전집을 발견한 이후 내 인생은 바뀌었다. 과장법 아니냐고? 60권짜리 SF 중역본 전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문학, 나아가서는 예술이 지닌 힘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소녀의 인생은 메리 셸리Mary Shelley,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를 발견하고 바뀌었을 것이다. 어떤 소년의 인생은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를 접하고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소년은 아마도 노어노문학과를 선택한 뒤 모스크바에 유학을 가서 지금은 푸틴의 러시아 정책을 연구하는 머리 벗겨진 노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뭐, 앞 문단에 따르자면 NASA 연구원을 거쳐 일론 머스크 밑에서 화성 탐사를 연구하는 스페이스X 직원이 되었어야 마땅하지만, 전형적인 문과인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행정학원론 수업 시간에 몰래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으며 눈물 훔치는 아주 비협조적인 대학생을 거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칼럼니스트 따위가 됐다. 하지만 이 또한 문학의 힘이 한 인간의 직업적 미래에 미미하게나마 어떤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인생의 전환’이라는 명제에 귀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행정학원론 시간에 아서 C. 클라크의 걸작을 읽지 않고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나는 지금쯤 복지부동의 공무원으로서 훌륭한 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 중반은 SF 문학 애호가에게 꽤 즐거운 시절이었다. 이때 한국은 폭발적인 문화 해방기였다. SF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나경문화, 고려원, 현대정보문화사, 시공사 등의 출판사가 줄줄이 SF 걸작을 번역해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친 듯이 모든 번역본을 사 모았다. ‘빅 3’라고 불리는 세 명의 SF 작가인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문학적 기적이었다. 물론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SF 문학에 딱히 관심이 없는 당신은 ‘지금 외계인의 지구 침공과 수천 년 미래의 우주 문명을 말하는 난삽한 외삽법적 예언에 무려 문학적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살짝 짜증 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글을 읽는 SF 문학 애호가들은 이미 이런 소리를 인생 내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가장 정확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럴 땐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왼쪽부터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Childhood s end』,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Foundation』,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The moon is
harsh mistress』

나는 어느 시점부터 SF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SF 문학의 위대함을 설법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들을 설득하는 일도 멈추었다. 순문학을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르문학 자체를 내심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장르문학 중에서도 SF 문학은 (그들 생각에) 문학적 카스트 제도에서 ‘달리트Dalit’, 그러니까 불가촉천민에 해당한다. 물론 그 심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모든 SF 신도가 그들의 신전 가장 높은 곳에 모시고 있는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한번 생각해 보자. 갑자기 전 세계 모든 도시에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나고, 외계인의 도움으로 인간이 새로운 진화 단계로 진입한다는 이야기를 순문학 애호가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내 생각에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베크Michel Houellebecq의 걸작 『소립자(Les Particules Élémentaires)』는 『유년기의 끝』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외계인의 존재를 멍청한 백인 남성의 섹스로 대체한 책이 『소립자』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은 또 어떤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에 감명받아 써 내린 이 시리즈는 한 문명의 역사적 ‘사고실험’이라는 점에서 모든 교과서에 실릴 가치가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88만원 세대』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약 『파운데이션』을 읽었다면 해당 책에서 한국 미래를 예측하는 챕터를 읽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동의한다.

『파운데이션』시리즈,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황금가지

나는 이 글을 통해 SF 문학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어떤 면에서 마니아의 경계 안에 SF 문학이 머무르는 게 더 낫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이 재미를 모르는 슬픈 사람들’이라며 여러분을 계속해서 불쌍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불쌍해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오덕의 기쁨은 원래 마음속 깊은 곳에만 머물러야 아름다운 법이다. 다만 나는 이 글을 ‘SF 문학 추천 10선’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둔 ‘하드 SF’보다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보다 무게를 둔 ‘소프트 SF’를 중심으로 채운 리스트다. 비교적 읽어내기 쉬운 순서다. 40년을 SF 광인으로 살아온 너무나도 문과적인 인간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뼛속 깊이 문과인 당신을 위한 SF 문학 10선

『여름으로 가는 문』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 김창규 옮김 | 아작
SF 거장 ‘빅 3’중 가장 재미있는 문장을 썼던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영화 〈빽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즐거운 시간 여행물. 

『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SF와 판타지 사이에서 거의 시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을 직조하는 거장의, 아마도 SF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단편 모음집.

『유년기의 끝』

아서 C. 클라크 지음 | 정영목 옮김 | 시공사

‘외계인과 인류 문명의 접촉’이라는, SF 문학의 가장 고전적인 서브 장르를 시작한 동시에 완성한 걸작.

『영원한 전쟁』

조 홀드먼 지음 | 김상훈 옮김 | 황금가지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1960년대 이후 모든 현대전의 참혹한 아이러니를 품은, ‘전쟁 SF 문학’은 물론 모든 ‘전쟁 문학’의 절정.

『이상한 존』

올라프 스태플든 지음 | 김창규 옮김 | 오멜라스

『엑스맨』을 비롯한 모든 ‘탄압받는 초능력자’물의 문학적 기원. 1934년 출간했지만 메시지는 전혀 낡지 않았다.

『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귄 지음 |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두 행성의 차이를 통해 제도, 종교, 페미니즘 등 인류 역사의 모든 체제를 품어내는 놀라운 사고실험.

『파괴된 사나이』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 김선형 옮김 | 시공사

‘불꽃놀이’라고 불리는 현란한 문체로 미친 듯 달려가는 SF 범죄물의 찬란한 고전.

『유빅』

필립 K. 딕 지음 |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

할리우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 필립 K. 딕의 최고 걸작. 비범한 상상력, 절묘한 풍자, 종교적인 주제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바벨 17』

새뮤얼 딜레이니 지음 |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장르와 ‘언어학, 기호학적 사고실험’의 융합. 맞다. 그런 게 가능하다. 

『쿼런틴』

그렉 이건 지음 | 김상훈 옮김 | 허블

양자역학을 소재로 필립 K. 딕 스타일의 첩보 SF 소설을 쓰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걸작은 조금 어려우니 앞의 아홉 작품을 모두 읽고 나서 도전하시라.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스몰 브랜드를 살리는 진또배기 브랜딩

Essay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지금은 브랜드 홍수 시대입니다. 대형 브랜드는 물론이고 스몰 브랜드도 합세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죠. 사람 또한 브랜드가 돼버렸어요. 이처럼 수많은 브랜드가 경쟁하는 상황에서 각자에게 알맞은 브랜딩 활동은 무척 절실합니다. 엎어진 브랜드도 일으켜 세우고, 잘 나가는 브랜드도 주저앉히는 브랜딩의 힘 때문인데요. 그래서 브랜딩 전문가인 전우성 디렉터님에게 이런 질문을 드려보았어요. “스몰 브랜드를 살리는 진또배기 브랜딩은 어떻게 하나요?” 이에 대한 현명한 의견이 궁금하시다면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저에게 브랜딩은 ‘남과 다른 나만의 가치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왜 우리 브랜드보다 저쪽 브랜드에 열광할까요? 그 브랜드가 우리 브랜드와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게 바로 브랜드 고유의 가치일 것입니다. 브랜딩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때 두 가지 지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나만의 가치로 만들 것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나만의 가치로 만들 수 있을까?

먼저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볼게요. 여러분의 브랜드는 무엇을 자신만의 가치로 세울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를 ‘핵심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보통 핵심 가치라고 표현하는데요, 가치라는 단어가 두루뭉술하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조금 어려운 구석이 있어서 경험이라는 단어로 한번 바꿔보았습니다. 핵심 경험은 현재 혹은 미래 고객이 우리 브랜드를 어떤 식으로든 경험할 때 반드시 그들이 느껴야 하는 경험을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반드시 전달해야만 하는 경험인 셈이죠. 단박에 이해하는 게 아마 쉽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전 핵심 경험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기능적 핵심 경험’과 ‘감성적 핵심 경험’으로요.

우선 기능적 핵심 경험에 대해 말씀드려 볼게요. 기능적 경험은 우리 브랜드가 지닌 기능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브랜드는 경쟁사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강점을 가지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고객에게 이를 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셨나요? 혹시 우리만의 강점을 찾기 어려우시다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이 시장에 들어왔을까?” 여러분은 왜 이 시장에 진입하셨나요? 이미 경쟁자들이 수두룩한 이곳에 조금이라도 나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니 들어오시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무엇이었나요? 만일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사람들이 우리 브랜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만약 세상에 우리 브랜드가 없다면,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할 점은 무엇일까요? 계속 물음표만 던져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통해서라도 우리 브랜드가 지닌 기능적 핵심 경험이 무엇인지 천천히, 깊이 있게 고민해야만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브랜딩을 진행했던 ‘라운즈ROUNZ’를 예시로 들어볼게요. 라운즈는 2016년 이스트소프트―알약, 알집으로 유명한 바로 그곳입니다―가 스타일팁이라는 안경 커머스 회사를 인수하면서 탄생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라운즈는 안경 커머스 시장에 진입한 팔로워이자 스몰 브랜드였죠.(아직도 여전히 스몰 브랜드이긴 합니다.) 그러나 라운즈는 자신만의 강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실시간 가상 피팅’ 기술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안경을 가상으로 착용해 보는 기능인데요. 이를 무기로 안경 커머스 시장에 과감히 진입한 것이었죠. 하지만 기업의 볼륨과 매출 성장이라는 원초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실시간 가상 피팅이란 패는 내려놓고 다른 경쟁자처럼 제품과 가격으로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라운즈의 브랜딩을 담당하면서 가장 먼저 고민한 부분은 실시간 가상 피팅을 브랜드의 기능적 핵심 경험으로 끌어올리는 일이었습니다. 실시간 가상 피팅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개편하고, 이를 알리는 데 모든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집중했죠. 그러자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긍정적인 리뷰가 달리기 시작했고, 주변에 조금씩 바이럴되기 시작했어요. 결국 라운즈는 전년 대비 놀라운 앱 다운로드 수치를 달성했습니다. 나중에는 앱스토어 ‘오늘의 앱’과 ‘한국을 빛낸 앱 스타트업’에 선정되는 영광(?)도 얻게 되었습니다. 라운즈는 실시간 가상 피팅 기술을 브랜드의 핵심 경험으로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 중입니다.

최근 런칭한 라운즈 애니메이션 필름. 애니메이션에서도 실시간 가상 피팅이 잘 보인다.

지금까지 기능적 핵심 경험의 도출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드렸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만의 강점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일단 강점이 없다면 무엇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과 다른 포인트가 있다면 이를 강점으로 만들어 알리는 거지요. 하지만 이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아마 많은 분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끝내 찾아내지 못한 분도 계실 테고요.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시장과 기술이 이미 상향 평준화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거죠. 이런 상황에서는 감성적 핵심 경험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성적 핵심 경험은 우리 브랜드만의 이미지와 스타일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 브랜드가 만들고 싶고,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 이미지는 남과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기엔 애매하신 분을 위해 제가 사례 하나를 들어볼게요.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앱서비스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은 지금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예시 중 하나입니다. 배민은 시장에 진입할 때 기능적 핵심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음식을 배달하는 기능이었죠. 하지만 남이 카피할 수 없는 독점적인 기술은 아니다 보니 다른 배달앱들이 시장에 빠르게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평준화가 진행되었죠. 그렇다면 배민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경쟁자와 구분지을 수 있었을까요? 가격 측면이라면 시장에 늦게 진입한 경쟁자가 더 적극적으로 내세웠을 거예요. 배민의 고객을 자신의 서비스로 어떻게든 끌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배민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배민만의 감성적 개성 확립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타이틀의 굿즈(예를 들어, USB 메모리 이름이 ‘이런 십육기가’라든지 말이죠)를 만들기 시작했고, 음식으로 삼행시를 짓는 ‘배민신춘문예’를 개최했습니다. ‘배민 치믈리에 자격시험’은 또 어떻고요. 여기서 배민이 얻으려고 한 감성적 핵심 경험은 무엇일까요? 바로 배민만의 유머 코드라는 개성입니다. 배민은 이런 개성을 통해 다른 배달앱과는 확실하게 감성적인 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배민을 좋아하는 팬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그들은 배짱이로 불리며, 배민과 함께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배달의민족이 진행했던 다양한 브랜딩 활동.

2017년 작은 도넛 가게로 시작해 이제는 너무도 잘 알려진 도넛 브랜드 ‘노티드Knotted’는 또 어떤가요? 노티드는 물론 맛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도넛에 비해 절대적으로 가장 맛있는 도넛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독 노티드의 도넛에 열광합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아직 브랜딩을 한창 진행 중인 스몰 브랜드라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콕 집어서 자신 있게 얘기하긴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 도넛 시장, 더 나아가 디저트 시장에서 노티드만이 줄 수 있는 감성적 경험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밝고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큰 몫을 했을 수도 있어요. 노티드 고유의 굿즈를 비롯해 다른 곳과 협업한 굿즈도 없어서 못 팔 정도니 말입니다. 노티드는 부모와 함께 방문하는 어린이를 위해 매장 한쪽에 노티드 캐릭터 색칠 종이를 비치하기도 했어요. 아마 노티드의 감성적 경험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도록 짜놓은 전략이 아닌가 싶은데요. 암튼 높은 인기에 힘입어 노티드 매장은 확장을 거듭했고 엄청난 팬을 형성했습니다. 노티드 자체가 도넛을 넘어 하나의 콘텐츠가 된 현상이라고 분석하는 기사도 나올 정도로요.

매월 당첨자를 추첨하는 ‘노티드 그림챌린지’

이제 감성적 핵심 경험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될까요?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기능적 핵심 경험이든 감성적 핵심 경험이든 간에 말이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기능적 핵심 경험과 감성적 핵심 경험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경험을 모두 고려해야만 해요. 기능적 강점을 도저히 도출하기 힘들다면 감성적 경험에 대해서 더욱더 깊게 고민하셔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고객은 분명한 장점이 있어야 우리 브랜드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에 언급한 지점 중 두 번째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을 ‘어떻게’ 나만의 가치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선 말을 꺼내기 전에 이 ‘어떻게’에 대하여 모든 분께 적용되는 해결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브랜드마다 카테고리, 제품, 서비스,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어떻게’ 또한 다양하게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브랜딩 요소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 알려드리는 게 더욱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하셨으면 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차별성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하는 것은 남―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경쟁사―과 무조건 달라야 합니다. 이에 대한 힌트는 배민의 사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알리든 간에, 반드시 남과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달라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다름’은 고객이 한번이라도 더 우리 브랜드에 눈길을 주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와 다른 브랜드 사이에 이미지 간극을 벌릴 수 있죠. 이와 비슷한 전략으로 노티드가 시장에서 승부를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일관성과 지속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엄청나게 다른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단번에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만의 다름을 꾸준히 그리고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싱어송라이터 장기하를 좋아하는데요. ‘싸구려 커피’를 수록한 1집부터 지금까지 그의 노래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잘 담겨있습니다. 일관성 있고 꾸준하게 담는 그 매력을 딱히 정의할 수 없어서, 팬들은 ‘장르가 장기하’라고 말하더군요. 저처럼 장기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공감할 겁니다. 앞서 말한 배민 또한 브랜딩 활동마다 배민만의 유머 코드를 담아서 그들의 감성적 경험을 세상에 꾸준히 알렸습니다. 지난 2015년부터 작년까지 계속 열리는 배민신춘문예를 보세요.(팬데믹 기간인 2020~2021년에는 쉬었지만요.)

배민신춘문예

이제 가장 첫 질문이었던 ‘스몰 브랜드를 살리는 진또배기 브랜딩’으로 돌아가 볼까요. 잠시 정리를 해볼게요. 막연히 ‘우리도 남들처럼 멋진 브랜딩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그냥 막막하기만 할 겁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브랜딩의 정의를 곱씹어 보세요. ‘남과 다른 나만의 가치를 만드는 행위’ 말이죠. 그리고 우리만의 핵심 경험으로 무슨 가치를 전달할지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남들과 다르면서 꾸준히 지속적으로 전달할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행위’라는 단어의 뉘앙스도 놓치지 말았으면 해요. 행위에는 끝이 없습니다. 브랜딩은 브랜드가 죽기 전까지 끝날 수 없는 작업이지요. 말 그대로 ‘무한 게임(endless game)’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우리를 우리답게 계속 알려야 합니다. 이건 정말 중요해요. 크건 작건 말이죠. 이런 과정을 거쳐 잠재 고객을 우리 고객으로 만들 수 있고, 이들을 우리 브랜드의 팬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제가 예시로 든 브랜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민, 노티드, 그리고 라운즈까지 그들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스몰 브랜드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말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브랜딩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게 결코 쉬울 리는 없겠죠.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저도 매번 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껴요.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어쩌면 ‘꺾이지 않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막연함이 앞설 때가 많아요. 대단하고, 엄청나고, 사람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아야 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때문에요. 만약 브랜딩을 시작하신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조금씩 스케일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그런 과정에서 브랜딩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보세요. 자신감이 생기면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웬디스

언젠가 미국 햄버거 브랜드 웬디스의 CMO, 칼 로레도Carl Loredo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는 도전자입니다. 경쟁사는 돈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다른 브랜드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야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에겐 큰 위험처럼 보일 도전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요.” 저에게는 꽤나 울림 있는 말이었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 어떤 브랜드를 운영하고 계시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시장의 리더이기보다는 도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면서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다른 결과가 생길 거예요.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Writer

전우성은 삼성전자에서 온오프라인 마케팅을 경험하고 영국 런던에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네이버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브랜딩 커리어를 시작했다. 온라인 편집숍 29CM의 브랜딩 디렉터로서 전사 마케팅 활동과 브랜딩을 총괄하며 대중에게는 차별화되고 팬심이 강한 브랜드, 동종업계에서는 브랜딩 잘하는 곳으로 불리며 차별화된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이후 스타일쉐어 브랜딩 디렉터를 거쳐 아이웨어 커머스 브랜드 라운즈에서 브랜딩 총괄이사로 재직했다. 네이버, LG전자, SK텔레콤 등 대기업 및 스타트업을 비롯해 대규모 콘퍼런스에서 강연했고 국내 경제경영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그래서 브랜딩이 필요합니다』『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저술했다. 담당하는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차별화된 모습으로 알려지고 사랑받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그는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실험적인 작품과 예술적인 감각을 사랑하며, 언젠가 워홀처럼 기존 공식을 깨는 브랜드를 만드는 게 꿈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Essay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창작자로 살아온 지 25년이 넘은 멘털 관리의 고수, 최소현 네이버 디자인 & 마케팅 부문장에게도 멘털 관리는 언제나 의지를 잃지 않고 연습이 필요한 현재진행형 이슈입니다. 창작자가 유리 멘털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그는 말합니다. 유리 멘털이든, 강철 멘털이든 진짜 중요한 건 각자에게 필요한 맞춤형 멘털 관리라고요.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알맞은 수를 찾아내는 끈기는 필수입니다. 멘털 관리는 단지 혼란스러운 순간을 극복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일상과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믿는 최소현 부문장의 멘털 관리 꿀팁이 궁금하다면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얼마 전 강연 때문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간 김에 유동룡미술관을 방문했다. 유동룡은 우리에게 ‘이타미 준’으로 알려진 재일 한국인 건축가의 본명이다. 세 시간가량 머무르며 건축뿐 아니라 가구 디자인, 회화까지 넘나드는 그의 작업 세계를 보면서 도대체 이런 끊임없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요인이 궁금해졌다. 일상을 살아내기에도 쉽지 않았을 시대에 말이다. (물론 지금도 어렵지만!)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20세기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지난 2020년 91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음악을 만들던 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생각이 바로 곡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그래서 작곡을 시작하면 늘 괴로워요. 생각은 있지만 더 다듬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고, 찾아내야 해요.”

신의 경지라 불리는 모리코네도 텅 빈 오선지를 마주하며 ‘백지(白紙)의 고독’과 싸웠다니! 술술 풀려도 혹은 풀리지 않아도 걱정이고 언제나 더 나은 결과를 내야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고인에게 묻고 싶어진다. 디자이너든 뮤지션이든 꾸준히 좋은 작업을 하며 활동을 지속하는 창작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 마음의 흔들림을 감지하는 섬세함, 감정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각기 다른 작품만큼 각자의 삶이 다양하겠지만, ‘멘털을 챙기는 비법’은 대동소이하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천은 너무도 어려운 동화 같은 이야기다.

유동룡미술관 전경 (좌)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 MOOUNT VIC FLICKS (우)

피로한 멘털은 창작자의 숙명?

나는 디자이너다. 디자이너로 살아온 지 벌써 25년이 훌쩍 넘었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숙제 처리하듯 만들어 내는 데 급급했고, 연차가 쌓이면서 의미와 논리를 찾다 보니 시기마다 다른 고민이 몰아쳤다.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회사를 창업해 20년간 운영하는 과정에서 ‘나는 크리에이터인가, 관리자인가’라는 번뇌에 빠지곤 했는데, 경영자로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여러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했다. ‘생각과 말, 글, 그림을 연결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현재 아주 큰 조직에서 여러 분야를 디렉팅하다 보니 이전과는 또 다른 정신적 에너지가 절실해졌다.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을 제시하는 해결사가 되어야 하고, 크고 작은 수많은 일에 대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새로운 영감을 자극하는 역할도 맡아야 한다. 그래서 매일 정신줄을 꼭 붙잡고 사느라 자면서도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단단히 쥐게 된다.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예고 동창들을 만날 때면 ‘나와는 또 다른 힘듦이 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느끼는 피로도는 조금 덜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틀리다는 걸 깨닫는다. “내 방에 걸려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란다, 친구야…” 자기 정체성을 작품에 담는 일은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없이 어렵고, 청중에게 설명하는 부담 또한 크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는지에 따라 진심과 열정이 담긴 결과물의 질이 결정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창작자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에 빠져 살아있는 감각을 총동원해 영감을 포착하느라 마음이 늘 바쁘다. 특히 요즘처럼 콘텐츠가 넘쳐나는 ‘감각의 과부하’ 시대에는 피곤함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보다 머리도, 마음도, 손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멘털에도 피로가 빨리, 자주 찾아온다.

불편한 이분법: 유리 멘털 vs. 강철 멘털

우리의 멘털은 유전이나 기질, 몸 상태 등의 내적 변수와 주변 환경, 날씨, 주어진 과제, 만나는 사람, 받아들이는 정보 및 자극 등 외적 변수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개인의 경험과 생활 습관은 기본이고 수없이 다양한 변수가 결합하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멘털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없다. 종종 ‘강철 멘털’과 ‘유리 멘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의 멘털 상태를 설명하거나 분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강철 멘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들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사건을 견디는 데 강한 내성을 보인다고 정의한다. 강철 멘털을 가진 성향은 스스로 꾸준히 발전하려는 의지를 기반으로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성장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멋진 존재로 인식된다. 반면, 유리 멘털은 부정적인 상황이나 스트레스에 직면할 때 쉽게 휘청이거나 부서지는 사람의 경향을 빗댄다. 주로 자기감정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실패나 거부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피하려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사람의 멘털은 강철 멘털과 유리 멘털처럼 단순히 하나의 특징으로 옭아맬 수 없다. 각각의 멘털은 개인적인 성격과 경험,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순간을 대처하는 방식에 따라 진폭이 크다. 강철 멘털이 반드시 모든 상황에서 강한 것도 아니고, 유리 멘털이 늘 약자인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상황에 따라 유리 멘털도, 강철 멘털도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며 자기 멘털 상태를 관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세상에는 창작자의 멘털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창작자는 예민하기 때문에 유리멘털이라는 편견이다. 창작자는 작업에 깊게 몰입하는 과정에서 밀도 높은 감성과 창의성을 발휘한다. 때때로 감정적인 변화나 스트레스가 강하게 생길 수 있지만, 내 주변을 살펴보면 다들 자기 멘털의 변화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잘 알고 있고 오히려 이런 변화무쌍함을 창의적 발상에 활용하기도 한다. 멘털을 극적인 상태로 몰아붙였다가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회복 탄력성이 꼭 필요한데 오랜 기간 창작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고유한 방법으로 꾸준하게 훈련한다는 사실!

몸과 마음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면

후배 디자이너가 내게 묻는 단골 질문이 몇 가지 있다. 그중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시간 관리법과 멘털 관리법이다. 나라고 정답을 알겠느냐만, 살아가며 알게 된 몇 가지 팁은 있다. 하지만 이게 모두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헤르미온느의 시계’ 같은 마법 장치를 사용한다면 여러 문제가 해결될까?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 멘털 쪽으로 이야기를 좁혀보자. 건강한 멘털은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이 아니다. 변화하는 자기감정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에 가깝다. 인생에 햇볕만 내리쬐면 따뜻할 것 같지만 실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사막이다. 각자가 대면하는 난해하고 난감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정에 대한 압박과 예상치 못한 문제가 피로감을 높이면 작업 효율이 낮아지고, 창의력도 점점 하락한다. 부정적인 피드백은 스트레스를 세 제곱, 네 제곱으로 증폭시키고, 결과물에 대한 불만족과 정체 구간에 끼여 옴짝달싹 못 하는 답답함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이 오면 답이 없다. 신선한 영감과 감각이 닫히면서 어떤 자극도 반사하고, 주변을 살피는 일조차 힘겨워지면 어느새 도망을 꿈꾸게 된다. 

웃프게도 나는 ‘나뭇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조상님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지낸다고 확신하던 삶에 예상치 못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아마 2006년쯤이었을 거다. 그 시기를 견디면서 이런 게 ‘내 팔자’라고 마음 먹고, 극복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어느 날,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강박에 의한 불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원인을 파악했다고 다음 날 기적처럼 편안해지진 않았지만, 힘든 감정을 객관화하는 힘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멘붕 게이지가 올라가면 신기하게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 번뇌를 만드는 소란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정신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와 인공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고, 사람에게서 조금 멀어지고, 손을 쓰며 몸을 움직이는 시도는 디톡스 효과를 확실히 발휘한다. 술 한 잔, 물 한 잔 번갈아 마시면 조금 덜 취하듯, (비록 1:1은 어렵지만) 스트레스 상태와 반대 상황에 나 자신을 놓는 연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상의 손쓰기, 요리

일상의 손쓰기, 만들기

여기서 잠깐! 한 가지 방법이 항상 동일한 효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여러 방법을 확보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매일 업무와 씨름하다 멘털에 통증이 오면 회사에 있는 로봇 충전 존에 잠시 서있는다. ‘오늘은 휴머노이드 빙의!’를 (속으로) 외치면서. 이 정도면 중증 아니냐고? 뭐라 놀려도 상관없다. 내가 편안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할 때는 글이라도 한 줄 쓰거나, 순간적으로 눈에 포착되는 이미지를 골라 SNS에 기록한다. 혼자 보는 일기와는 다르게 커다란 광장에 무언가 쏟아내는 카타르시스를 잠시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서 Pause, 즉 잠시 멈춤을 통해 아주 잠시라도 편안함을 온전히 느끼며 에너지를 회복해야 할 때 요즘 가장 효과 만점이었던 방법은 ‘깊은 호흡’이다. 코로 길게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길게 내쉬며 ‘잠깐 먼 곳 바라보기’까지 시전하면 마치 온몸을 조이던 갑옷을 벗는 느낌이 찾아온다.

SNS에 업로드한 이미지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예민하고 섬세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스트레스다. 하지만 무작정 참으면 병난다. 숨구멍이 꼭 필요하니 빈 벽에라도 중얼중얼 털어놓자. 그래야 살 수 있다. 나는 종종 메일 계정 두 개를 활용해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어떤 상황이야?’, ‘무엇이 너를 힘들게 하니?’ 등 몇 가지 질문을 메일로 날리며 대답해 본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역할을 동시에 맡으면 관찰자 시점으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건강한 멘털 관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연습과 신체의 단련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은 서로 이어져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힘들다. 몸이 편안해야 멘털도 건강하고, 창작에 쏟을 에너지가 생긴다. (고백하건대, 나는 현재 몸을 제대로 단련하지 않아서 반성 중이다.)

항상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털이 정말 건강할까? 힘든 마음과 복잡한 생각을 숨기다가 터져 버리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멘털은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서 그때그때 잘 회복해야 한다. 나는 애티튜드를 ‘안과 밖의 여러 자극과 경험에 대한 반응의 총체’라고 정의한다. 애티튜드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멘털을 관리하는 힘이 달라진다. 멘털 관리는 단지 혼란스러운 순간을 극복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일상과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특히 자기 이해와 자기 관리가 절실하다. 창작자는 종종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럴수록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를 모두 존중하며 자기에게 맞는 극복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코 의지를 잃지 말자. 힘들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용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오늘도 수고한 나에게 친절해지는 연습을 권한다. 이렇게 속삭이는 건 어떨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Writer

최소현은 현재 네이버에서 디자인 & 마케팅을 총괄하는 부문장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리챌 초기 멤버로 디자인 팀장을 지낸 후 2002년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그룹 퍼셉션을 창업했다. 플레이스캠프제주 브랜드 경험 디자인 구축, 엘지유플러스 브랜드 정체성 재정립, 할리스커피의 BI 및 SI 리뉴얼 등을 진행한 퍼셉션은 작년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다. 생각, 말, 글, 그림의 연결자를 지향하는 그의 관심사는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는 것. 요즘 조직에서 장군과 이모 역할을 동시에 맡을 수 있는지가 무척 궁금하다.

나는 자비에 돌란을 믿지 않는다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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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가 귀히 모시는 에세이 필자인 김도훈 님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여름철에 들이닥치는 다양한 영화 시사회에 다녀오느라 요즘 무척 바쁜 몸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신작 영화에 대한 리뷰를 부탁하려고 했는데요. 의외로 그의 대답은 ‘노no’. 알고 보니 얼마 전 뉴스에 뜬 자비에 돌란의 은퇴 소식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답니다. 김도훈 작가가 기억하는 돌란은 어떤 모습일까요? 돌란의 은퇴를 믿지 않는다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을 만난 적이 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난 건 아니다. ‘만났다’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라도 나눴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봤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나는 돌란을 가까운 발치에서 봤다. 한 5m 거리 정도?

2010년이었다. 영화잡지에서 일하던 나는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로 출장을 갔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 이창동 감독의 ‹시›가 동시에 경쟁 부문에 오른 해였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는 일종의 2차 경쟁 부문이라 할 법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출품됐다. 한국 영화가 경쟁 부문에 오르면 칸 해변에도 한국 기자들이 많아진다. 결국 이창동 감독이 각본상을 받고, 홍상수 감독이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흥겨운 해였다.

사실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돌란의 ‹하트비트Heartbeats›였다.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함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다. 나는 칸 영화제에 가기 전 돌란의 데뷔작인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her›(2009)를 봤다. 엄마를 죽여버리고 싶은 16살 게이 소년의 이야기였다. 에너지가 굉장했다. 영화는 엄청 거칠고, 서툴고, 직설적이었다. 그게 매력이었다. 나는 데뷔작부터 지나치게 유려하게 만드는 감독보다 뭔가 좀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도 뺨을 후려치는 것 같은 치기를 지닌 감독을 좋아하는 편이다. 돌란이 딱 그랬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부산 사투리로 “하따 이 새끼 보소”라고 내뱉은 기억이 난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면 저절로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는 서울 사투리보다 좀 더 본능적인 언어라 그럴 것이다.

‹하트비트Heartbeats›, 2010 (좌)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her›, 2009 (우)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her›, 2009 © FILMGRAB

슬프게도 나는 칸 영화제에서 ‹하트비트›를 보지 못했다. 대신 함께 출장을 갔던 김혜리 기자가 봤다. (선배라고 썼다가 호칭을 기자로 바꾼 이유는, 요즘 아이돌까지 공식 석상에서 선배 선배 거리는 게 영 마뜩잖기 때문이다.) 김혜리 기자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땠어요?”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를 봤을 때 그분 특유의 어떤 표정이 있다. 나는 그 표정을 두 번 더 겪었다. 한 번은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나오던 중 “선배 이 영화 너무 좋지 않아요?”라고 했다가 목격했다. 또 한 번은 첫 번째 ‹토르› 영화를 보고 나오던 중 “저는 지금까지 나온 마블 영화 중 이게 제일 좋네요”라고 했다가 목도했다. 절대적으로 인자하지만, 어쩐지 근심이 서려 있는 그 표정. 나는 기대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제 기간 중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돌란을 봤다. 내가 간 식당 바로 옆 파티오에 앉아서 몇몇 힙스터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영국 록 스타 모리세이Morrissey처럼 앞머리를 무스와 스프레이로 단단하게 치켜올리고, (마치 알프스의 마터호른 같았다) 가슴까지 파인 하얀 티셔츠를 입고, 저게 어떻게 사람 몸에 들어가나 싶은 검은 스키니진을 입고, 굽이 앞머리처럼 높은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반했다. 아니. 돌란은 어떻게 봐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반했다. 그러니까 이건 뉴진스의 ‹어텐션Attention› 뮤직비디오를 보고 민지에게 반한 것처럼 반한 것이다. 뭔가 아름다운 존재를 목격했을 때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하트비트›가 별로여도 나는 이 남자를 계속 좋아하겠구나.

Photography by Denis Makarenko © Shutterstock

잠깐만. 지금 혹시 외모 때문에 감독의 팬이 됐다고 고백하는 거냐고? 아니, 솔직히 좀 그러면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외모까지 잘 생기면 좀 더 애정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솔직히 생각해 보시라. 나는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이 잘 생겼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좋아 보인다고 말한 동료 평론가도 한 명 알고 있다. 한 사람의 팬질이 꼭 예술적인 이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세세한 요소가 있을 수 있다. 외모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나는 ‹하트비트›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금발의 남자 주인공을 자기보다 덜 멋있는 사람으로 캐스팅한 덕에 돌란의 예쁨은 유독 빛이 났다. 아주 반짝반짝거렸다.

다만 감독으로서 그의 커리어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아마도 젊고 치기 어린 감독이 어쩌다가 내놓은 근사한 데뷔작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트비트›는 예쁜 영화지만 데뷔작처럼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2012)를 보고 나는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돌란은 이르게 스타가 된 자신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카메라 뒤로 빠지는 선택을 했다. 멜빌 푸포Melvil Poupaud가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이 영화는 무려 3시간에 달하는 유미주의적 영화 만들기의 극치였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일하던 나는 이렇게 20자 평을 썼다. “자비에 돌란은 과대 평가된 힙스터 감독인가? 이 영화는 그 모든 의심에 대한 당돌한 대답이다. 종종 예술적 허세가 폭발하는데, 이렇게까지 허세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니 두손 두발 다 들고 투항하게 된다.” 그렇다. 나는 투항했다.

‹로렌스 애니웨이Lawrence Anyways›, 2012

‹로렌스 애니웨이Lawrence Anyways›, 2012

스릴러 영화 ‹탐엣더팜Tom at the Farm›(2013)과 ‹마미Mommy›(2014)를 거치며 그의 영화는 정말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화했다. ‹마미›는 여러 부분에서 데뷔작인 ‹아이 킬드 마이 마더›의 연장이었다. 감정은 더욱 격렬한데 솜씨는 더욱 단아해졌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은 ‹마미›의 바로 ‘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1 비율의 정사각형 프레임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록 밴드 오아시스의 ‘원더월Wonderwall’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양손으로 화면을 열어젖히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솔직히 이런 형식적 실험 혹은 장난은 잘못 사용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게 마련인데, 유치하지 않았다. 아니다. 솔직히 유치했다. 그런데 그 유치한 진심이 꽤 감동이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오로지 돌란처럼 약간 자신의 재능에 취한, 그러나 확실히 재능이 절정으로 치닫는 젊은 감독만이 해낼 수 있는 영화적 치기였다. 나는 그 치기가 어디까지 더 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탐앳더팜Tom at the Farm›, 2013

‹마미Mommy›,2014

‹탐앳더팜Tom at the Farm›, 2013 (좌)

‹마미Mommy›,2014 (우)

사실 나는 이 글을 조금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돌란은 얼마 전 스페인 매체 «엘 문도El Mundo»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는 “예술은 쓸모가 없고 영화에 전념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 단호한 워딩은 순식간에 인터넷 세계로 퍼져나갔다. ‘자비에 돌란이 은퇴를 선언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퍼져나갔다. 며칠 뒤 돌란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터뷰를 정정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통역을 거치며 잘못 일반화된 부분이 있다며 “영화를 그만 만들고 싶다고 말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예술은 쓸모가 없고 영화에 전념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TV 시리즈 등을 만들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 해명은 조금 이상했다. 영화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결국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직접 연출한 ‹The Night Logan Woke Up›에 배역으로 출연한 자비에 돌란

며칠 뒤 «엘 문도»는 인터뷰 오디오 녹취를 공개한 뒤 “자비에 돌란이 애초 언급했던 내용과 일치한다”며 반박을 내놓았다. 굳이 이런 반박을 내놓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돌란이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꼭 자기가 한 모든 말을 지키고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막상 인터뷰를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정신 좀 차리라”며 전화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내가 그의 친구였다면 곧바로 퀘벡에 전화를 걸어 “마음이 불안정할 때는 제발 인터뷰 같은 거 하지 마”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칸 영화제의 기억은 제발 좀 잊어버리라”고도 말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그의 순간적 혐오가 분명 마지막 두 영화에서 얻은 경험에 기인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16년 돌란은 ‹단지 세상의 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문제는 이 영화가 어떻게 봐도 그의 최고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화제 기간 중 매체들이 내놓는 별점은 경쟁작 중 최악이었다. 나 역시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스물일곱의 돌란이 조금 더 성숙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형식적 재주를 모조리 제거한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 큰 상을 받자 스캔들이라고 일컬을 만큼 비난이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던 매즈 미켈슨Mads Mikkelsen이 울면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비에 돌란을 멍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밈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기 시작했다. 아직 한국에 공개되지 않은 영어 데뷔작 ‹존 F. 도노반의 죽음과 삶›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평받았다. 로튼토마토 평점을 다 믿는 건 곤란하지만, 신선도 19%는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2019년 작 ‹마티아스와 막심›은 모든 국가에서 처참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자신의 세계를 견지하면서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일종의 이정표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되지. 그런데 어랍쇼? 은퇴 선언을 해버렸다.

‹마티아스와 막심Matthias et Maxime›, 2019

나는 자비에 돌란의 은퇴 선언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을 생각이다. 마지막 두 영화가 비평적, 흥행적으로 실패를 거둔, 이제 갓 서른이 된 예민한 예술가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왜냐하면 마흔 중반의 나는 서른쯤의 나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번의 위기를 겪는다. 첫 번째가 서른이고 두 번째가 마흔이다. 마흔이 중년의 위기라면 서른은 정체성의 위기다. 마흔은 정신과 육체가 마침내 절정을 넘어서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는 단계다. 더는 젊은이로 불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순간이다. 더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여유도, 시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다면, 축하한다. 아직 인생 최악의 정신적 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른은? 사람이 다시 중2병에 접어드는 단계다. 이팔청춘도 지났으니 이제 뭔가 제대로 된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 마흔이 넘은 나 같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하나다. 그냥 자기를 믿고 밀어붙이라는 것이다.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보다 현명한 방법은 사실 몇 없다. 아니, 갑자기 글이 꼰대의 인생 조언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글은 썩 좋지 않다. 그러니 마지막은 다시 돌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삐뚤어질 정도로 돌란의 열성적인 팬이라면 지레 은퇴를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국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나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은퇴한다고 선언했다가 슬그머니 복귀할 때는 자기 인생 최고의 것을 내놓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돌란이 계속 “여전히 감성만 가득하고 무게감이 없다”고 비평가가 불평하는 영화를 만드는 힙스터 예술가로 늙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인생은 길다. 그리고 불공평하다. 모든 사람이 항상 더 성장하며 더 나은 걸작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나는 육십이 되어서도 ‹마미›의 그 장면을 다시 보며 울컥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현대미술 설명서: 당신은… 젊은 OO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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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신선한 관점으로 현대미술을 바라보게 돕는 박재용 님의 현대미술 설명서, 새로운 글이 도착했습니다. 저희가 한 번씩은 생각하던 주제인데요. 대체 한국에서 ‘젊은’ 작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호칭이 풍기는 의미는 너도나도 잘 알겠는데, 실제로 파악하는 기준이 존재할까요? 만일 있다면 어디에 근거를 두는 걸까요? 더불어 특급 고령화 시대가 달려오는 지금, 젊은 작가를 바라보는 기준은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까요? 조곤조곤 물어오는 재용 님의 질문, “당신은…젊은 OO인가요?”에 대해 다 함께 생각할 시간입니다.

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 개막식 기념사진. 참여 작가와 전시 관계자는 전시를 개최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앞에서 촬영에 임했다. (사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CC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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