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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녹색으로 포착한 날카롭지만 유연한 풀 드로잉

Writer: 이수진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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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이수진 작가는 풀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에요. 마커로 그린 초록의 세계는 언뜻 보아도 범상치 않은데요. 유년 시절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보낸 작가는 평생 산속에서 살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해요. 그러나 제주도에서 풀을 포착한 흑백 사진을 접하곤 풀과 초록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답니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수정 작가의 솔직한 작업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작가님,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수진입니다. 대학교에서 음향 제작을 전공하고, 사운드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스물여덟 살에 그림책을 만드는 학교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공부했고, 졸업 후 창작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답니다. 그림을 시작한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저는 항상 제게 예술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최선의 방식으로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매료되었죠.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답니다.

‹Green Drawing› 시리즈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아요.

무엇을 그릴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던 차에 동생과 제주도 여행을 떠났죠. 그곳에서 만난 지인의 소개로 한 사진 작가분을 알게 됐고, 그분의 작업을 직접 보며 이야기하는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장의 사진에 완전히 사로잡혔어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들판에 무성하게 자란 풀이 굽이치는 제주도의 풍경을 흑백 필름으로 담은 사진이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그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답니다. 이후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풀’을 보게 되었어요. 풀의 생명력은 정말 놀라워서, 도심 한복판에서도 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요. 아주 단순한 형태를 지닌 풀을 관찰하면서 그것이 가진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다양한 감정을 발견하는 일이란 때로는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이를 그림에 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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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제목의 ‘Green’은 보통 식물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작가님은 녹색이지만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한 다른 무언가를 더 표현하신 것 같아요. 과연 무엇일까요?

초반에는 대상을 아주 자세히 관찰하고 그 모양을 가까이에서 담아내는 데 집중했어요. 작업을 계속하면서 시야를 확장하다 보니 점차 풀의 지리적인 형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되었죠. 날카로운 직선과 뾰족한 끝, 아주 단순한 형태를 가진 풀의 모양은 그것이 한데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그 덩어리가 이어지면서 물결 같은 유연함을 만들어낸답니다. 작업을 통해 풀이기도 했다가, 흐르는 구름이나 떨어지는 물, 타오르는 불이기도 했다가 피어오르는 연기가 되기도 하면서 계속 모습을 바꿔나갔어요. 이러한 순환 자체가 자연의 속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녹색’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랐어요. 어린시절에는 평생 이곳에서 살게 될까 봐 늘 두렵고 답답했죠. 산을 반으로 쪼개면 더 넓은 세계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산이 거대한 몸뚱이로 마치 제 앞날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다가왔답니다. 제게 초록은 벗어나고 싶은 것, 떠나고 싶은 것을 상징하는 색이었어요. 성장 과정에서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을 구분하면서, 어떤 것이 새롭고 독특한지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무엇을 그릴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고민하면서도 자연은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죠. 하지만 작업을 계속해나가면서 저는 스스로와 아주 가까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제게 이미 속해 있었기에 너무도 익숙해서 평소 보지 못했던 것이 실은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지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욕망을 느껴요. 저를 갈아 안료로 만든다면 그것은 반드시 초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지금은 녹색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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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 캡션을 보고서야 재료가 마커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전통적인 회화 재료를 벗어난 마커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잉크 재료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물에 섞어서 쓰는 재료를 다루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에요.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을 항상 동반하거든요. 여러 재료를 탐구한 끝에 이런 성질의 재료들이 저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마커는 팔레트, 물, 붓이 필요 없어요. 사용법은 아주 단순하고, 누구든 쉽게 다룰 수 있어요. 저는 이런 단순함이 좋답니다. 한지 위에 마커로 그리면 마치 먹을 사용하는 것같이 종이가 젖어 들어가는 느낌도 좋고요. 잉크는 실크 스크린 잉크를 사용해요. 각자 머릿속에는 각기 다른 명도와 채도의 초록색이 존재할 텐데요. 제 머릿속에 존재하는 초록과 가장 비슷한 색이라서 자주 사용한답니다.

마커와 잉크는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신중히 작업하시겠어요. 작업의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여쭤봐도 될까요?

작업은 주로 머릿속에서 이루어져요. 사실 이런 방법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줄곧 이렇게 작업을 해왔어요. 작업에 대한 구상은 주로 누워 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굴려서 네모난 틀에 구겨 넣는 것에서 시작해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그때 책상에 앉아서 참고할 만한 이미지를 찾고, 그중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몇몇 이미지를 모니터 화면에 가득 띄워놓은 뒤, 그제야 손을 움직이며 작업을 시작하죠. 미리 연필 스케치를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빠르게 그려내는 편입니다.

‹Green Drawing› 시리즈에 얽힌 특별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작업 덕분에 맺게 된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있어요. SNS에서 그림을 보고 무작정 연락을 해와서 만나게 된 분도 있고, 시리즈 작업 몇 점을 구매하고 직접 제 작업실로 찾아와 준 분도 있고, 재미있는 만남이 많았습니다. 누군가 제 작업을 알아봐주고, 적극적인 응원을 보내는 경험이 제게는 아주 특별하답니다.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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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캔버스 같은 매개를 벗어나는 실험적인 계획을 고민하고 계시나요?

이미지와 음향을 결합한 콘셉트의 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직접 디자인한 사운드와 함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어떤 전시장에 가면, 캡션 하단에 헤드폰 모양의 표식이 붙어 있고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각자의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듣곤 하잖아요. 이와 같은 구조로 그림마다 각각 사운드를 디자인해서 시각적인 감각과 청각적인 감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전시를 꿈꾸고 있어요. 여기에서 이미지가 선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애플리케이션에 나열된 사운드 파일을 먼저 감상하고 이미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청각적인 이미지가 될 수도, 시각적인 사운드가 될 수도 있는 방식으로 말이죠.

요즘 자신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생활 속 스테레오타입이 있으신가요?

경제적인 부분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불과 한두 달 전까지도 그림이 늘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을 경영하는 부분에서는 아주 무능한 상태였어요. 아직까지는 그림만 그리면서 생활을 유지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늘 마이너스인 상태가 지속되었거든요.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비관적 전망을 동반한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스트레스가 증폭되어 무기력과 우울감이 함께 찾아왔어요. 현재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르바이트 일도 작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텨내는 중입니다.

작가님의 작업이 기대고 있는 이 시대의 스테레오타입, 작가님의 작업을 유효하게 만드는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현대는 초연결사회입니다. SNS를 통해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손쉽게 소통할 수 있죠. 그렇게 연결된 사람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판매하기도 하고, 다른 재미있는 일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연결은 더 많은 가능성을 낳죠. 저는 SNS를 통해 제 작업을 필요로 하는 여러 사람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계속 연결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매일 새로운 것을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늘 존재해요. 그래서 가끔은 이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스스로 충분히 고립되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이 시대에 맞는 균형 감각이 필요해요.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green drawing, beattitude, 이수진, 녹색 드로잉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해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마냥 신나 하는 편이에요. 작업을 마치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작업에 대한 구상이 이미 머릿속에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의 시리즈로 묶을 수 있을 만큼 작업량이 어느 정도 채워지니 계속해서 같은 포맷에 맞춰서 하는 작업 방식에 지치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것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때부터 작업이 꽉 막힌 듯 풀리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됐어요. 더 좋은 작업, 더 새로운 작업에 대한 열망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죠. 사실 이런 시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와요. 극복하는 방법은 아직 모르겠어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시기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에 가까워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창작자에게 필요한 버티는 노하우를 공유해주시겠어요?

질문을 읽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림을 시작하고 만나게 된 아주 귀한 인연들이에요. 동료 작가들과 창작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열렬하게 지지한 덕분에 지금까지 계속할 수 있었어요. 비슷한 고민을 나누면서 쭉 함께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늘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답니다. 또한 제 그림을 보고 꾸준히 응원을 보내오는 분들, 그림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만난 분들,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해주신 분들이 생각나네요. 결국 그림을 그리는 이도 사람이고, 어떤 형태로든 필요로 하고 소비하는 이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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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이수진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회화 작가다. 주요 작업으로는 런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애니웨이즈Anyways와 함께한 스피커 브랜드 소노스Sonos의 ‹Sound Is› 프로젝트, 독일 페미니즘 잡지 «Missy Magazine»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영국의 밴드, ‘스퀴드Squid’의 앨범 커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을 진행했다. 2021년 아티스트 컬렉션 쇼인 «써킷 서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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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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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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