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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중립적이고도 완전무결한 문자 ‘숫자’

Writer: 민본
민본, 타이포그래피, 시각디자인, 숫자, 아라비아, typography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세상에는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의 문자와 숫자, 문장부호뿐만 아니라 화폐 기호나 심볼 등을 직접 디자인하는 일을 하는 건데요. 그중에서도 아라비아 숫자의 매력에 빠져 숫자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는 디자이너가 있어 그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나의 30대를 돌이켜보면 직업적 관심사와 개인적 호기심의 대부분이 활자의 생김새에 대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활자면에 새겨지거나 디지털 인터페이스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활자라는 매체에 어떤 ‘값’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그 형상을 그려보고 만들어보고 활자화하는 일을 탐욕스러우리만치 반복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일을 필요로 하던 한 기업에서 여러 나라의 문자·숫자·문장부호·화폐기호·각종 심볼 등을 도안하고, 이를 주로 컴퓨터·스마트폰 등의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타이핑하거나 폰트로부터 꺼내 쓸 수 있도록 운영체제에 집어넣는 작업을 원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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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수치, 의미와 상징의 ‘값’을 가진 형상들.

때로는 이색적인 실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라틴 알파벳을 한글처럼, 한글을 아랍 문자처럼 그려보기도 하고, 글자를 그림처럼 다루었다가 그림을 글자처럼 그렸다가 해보는 실험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모든 형상이 내 머릿속에서 한 종류로 엮이며, 사실 이 모든 흑백의 세계 속 운동의 흔적들은 오직 한 가지의 공통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추상적 상상에 이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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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붓글씨의 획을 라틴알파벳구조에 대입한 실험적 라틴알파벳 활자디자인 ‘바르바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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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닙펜을 이용한 한글 자모 도안(타이포그래피잡지 «히읗» 3호의 ‘백지’ 중 일부, 2012).

잠시 탐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러한 나의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서로 다른 시각 문화들이 뒤섞일 때 발생하는 불협화음들을 해소해 보이는 데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그것을 불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격상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냉전 종식 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나의 의식 깊은 곳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언가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려는 일환으로 더욱 의욕을 부리게 했던 것도 있다. 내가 특히 관심이 있었던 대상은 지난 몇 세기 사회 총체적 우위를 점하여 내게는 무의식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던 유럽의 활자 문화와, 내가 어릴 때부터 배워 익힌 한자 문화권의 글자들 사이의 불협이었다. (참고로 필자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교육을 일본에서 받은 바 있어 소위 ‘CJK’라 묶여 불리는 한자과 가나와 한글을 한 덩어리로 인지하는 데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같은 층위에 존재하지만 거리감도 명확한 이 두 존재, 즉 유럽의 활자와 동아시아의 활자를 서로 비교하다보면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잘 드러난다. 공통점을 묶어서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일, 차이점을 추려서 각 지역 문자의 특성으로 분류하는 일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육체적·정신적 활동이었으나, 생각보다 이에 동조해주는 이가 많지는 않아서 늘 다소 외롭게 생각을 이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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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영문 UI폰트와 일문 UI폰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틀린 그림 찾기처럼 직접 찾고 설명해보세요.

하지만 이렇게 나름대로 범국제적인 분류 작업을 해본 덕택에 나는 국적과 스크립트의 종류를 불문하고 (현대에 와서 무의미해져버린) 활자디자인의 ‘관습’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보편성도 없고 지역성도 드러내지 못하는 형상들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활자 작업에서만큼은 이러한 관습들을 걷어내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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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안에 숫자가 두 자리 수로 늘어나면서 마치 한자의 좌변과 우방처럼 글자폭이 좁아지는 모습은 ‘지역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좌측 하단 숫자 2가 원과 맞닿아버린 형상은 아무래도 ‘인간적인 실수’처럼 보인다. 이런 실수를 굳이 고치지 않는 것은 디지털시대에 의미없는 관습의 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상당수의 의미 있는 지역적 전통들, 역사적 흔적들을 활자 안에서 발견하고는 벅찬 가슴으로 내가 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써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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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줄부터 Graphik, Hiragino Kaku, SF 폰트. 라틴 알파벳 폰트에서 한 활자면 안에서 획간 굵기 차이를 확연하게 처리한 디자인은 좀처럼 본 적이 없다. 반면 일본 ゴジック 계열 활자에서는 폰트의 굵기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특정 글자들에 도리어 가느다란 획을 활용하는 ‘전통’이 있다. 맨 아랫줄은 이를 한 라틴 알파벳 폰트 속 화폐기호에 적용해 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관습과 전통 간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여, 종종 전통을 중시한다는 핑계로 활자디자인에 있어 의미없는 관습들을 고쳐나가기를 게을리한 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한 활자체 디자인 안에서 보편적 관점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형태들을 발견하더라도, 특수성의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정당화하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 모종의 게으름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혹은 주변 동료들과 함께 플레이하던 게임들이 몇 개 있었다. 바로 라틴 알파벳과 CJK 문자군에 속하지 않는 제3의 글자 디자인 해보기(중동 문자, 인도 문자 등), 아직 없는 글자와 기호 고안해보기(가상화폐 기호, 한글 이탤릭 등), 양쪽 스크립트에 동시에 존재하는 글자 중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한지 비교해보기, 더 나은 형태 제시해 보기 등이었다.

아라비아 숫자 디자인은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에 해당하는 즐거운 게임 중 하나였다. (아라비아) 숫자란 고대 인도에서 출발하여 아랍 문명을 통해 세상으로 번져나간 기호 체계이다. 효용성이 그 어떤 다른 숫자 체계보다 높아서 세계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이들은 오랜 시간 주로 유라시아 전역을 구석구석 여행하며 곳곳에 각지의 글자 문화와 교배하여 자신의 분신들을 낳고 다녔다. 때로는 해당 지역의 스크립트와 비슷하도록, 때로는 해당 지역의 글자와 생김새가 사뭇 다르더라도 서로 무리없이 어울리도록 하는 현지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때로는 현지의 숫자와 주도권 경쟁을 벌이다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둘다 활자화되어버린 경우도 볼 수 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 디지털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문자 융합 과정의 축소판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를 관찰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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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문자를 쓰는 카타르의 자동차 번호판을 통해 아라비아 숫자와 아랍 문자 속 숫자를 비교해볼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아랍스러운가(아라빅한가)? Neil Parker, Highway Codes from the Third Article in the Octavo, Journal of Typography: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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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대성당 내부 정원 바닥의 기념비. 1693년 비문이 새겨질 당시 유럽인의 숫자와 알파벳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숫자 1과 대문자 I는 같은 형태로 혼용되고 있으며 숫자 3과 대문자 S는 상당 부분 형태적 유사성이 있다. 한편 숫자 6과 9는 글자보다는 오히려 우측 하단 새의 형태와 더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Photography © 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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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동식물 공원의 기념판. 중문판의 숫자 표기는 아예 한자로 되어 있다. Photography © 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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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해피밸리의 한 아파트 입구. 홍콩 북위해서체의 호방한 한자문 사이에 숫자 ‘5’는 외래종으로서 어색하게 위치해 있다. Photography © 민본

한편 아랍은 자신들의 문자인 ‘알 압자디얄 아라비야’와 최대한 유사한 형태로 숫자를 재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중동 지역의 글자 문화는 강력한 캘리그라피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규격화와 단순화를 통해 인쇄를 쉽게, 정보 전파를 빠르게 하는 데 가치를 두곤 하는 유럽 타이포그래피가 아랍 세계에 전래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랍 활자세계에서 이 손의 전통은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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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eza. 아라빅 알파벳들(윗줄), 왼쪽부터 아라빅 숫자 ‘0, 9, 8, 7, 6, 5, 4, 3, 2, 1’(아랫줄). 알파벳과 숫자에 동일한 펜획 운용 방식이 적용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유럽은 알파벳과 숫자의 동질화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적절한 어우러짐 속 미묘한 차별화 전략을 세운 것 같다. 대문자, 소문자와 숫자의 활자 높이를 맞추어 숫자를 타이포그래피 속으로 편입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한편으로 숫자 곳곳에 알파벳과는 대조적인 획 굵기 대비를 가지고 있다거나, 전반적 획 굵기가 알파벳의 그것과 다르다거나, 전반적인 폭이 좁혀져 있다거나 하는 미묘한 처리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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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amond의 대소문자와 대문자 규격에 맞추어진 숫자, 소문자형 숫자(윗줄), Bodoni의 예시(아랫줄).

아시아에서는 숫자의 형태를 한자의 형태와 유사하게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婁’자와 ‘攵’자가 만나 ‘數’를 만들 때 각 글자의 너비는 각 변에서 반절로 줄어들어 합자 이후의 활자 크기가 원래 낱글자의 크기와 동일하게 유지된다. 이 법칙이 숫자의 조형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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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기노의 예시. 왼쪽은 두 글자를 한 활자면에서 합치기(합자) 전, 오른쪽은 합자 후. 맨 아랫줄의 알파벳은 좌우폭을 유지한 채 사이즈만 줄어드는 유럽식 합자 방식을 보여준다.

글머리에 나의 30대는 처음부터 마치 넓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멋지게 길을 떠났던 양 썼지만, 실은 양극화 내지는 흑백 논리의 오류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내 머릿속 양 극단에 제멋대로 유럽 활자와 동아시아 활자들을 놓고 그 사이를 잇는 하나의 줄기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활자디자인이라는 영역에 들어와보니, 이 지형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방팔방으로 한없이 펼쳐진 일종의 입체적 궁창과도 같았다. 양극을 잇는 직선에 꿰어지는 존재는 몇 되지 않고, 그 주변에 수많은 형태와 상념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 활자계 안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이곳 저곳 떠다니던 중 유독 강력하게 자신의 개성을 빛내고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숫자였다. 누군가에게 붙잡혀 자신의 위치가 고정될 일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머무는 곳마다 현지 분위기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유연하게 변화시킨다. 소리나 뜻처럼 분별과 해석에 있어 애매모호한 것들의 값은 제쳐두고 ‘수’라는 중립적이고도 완전무결한 대상을 제 안에 담고 있어 이지적인 이미지마저 풍긴다. 열 개밖에 되지 않는 단촐한 구성원 수는 이들의 존재감을 한결 더 가볍게 해주는 요소이다.

이들이 우리 한글 디자인의 영역에 도착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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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민본은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다. 2000년대 말부터 스페인, 영국, 미국, 중국, 한국 등지를 옮겨다니며 다양한 문자 문화를 접하고 이를 자신의 연구와 작업의 자양분으로 삼아 왔다. 특히 2013년부터 6년여 간 미국 애플 본사의 폰트팀과 디자인팀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동안 애플의 세 가지 운영체제(iOS, MacOS, WatchOS)에서 쓰이는 거의 모든 라틴 알파벳과 숫자와 기호와 심볼의 디자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bonm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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