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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에디터적 사고력이 왜 모두에게 필요하냐고요?

Writer: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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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최혜진 작가는 19년 차 에디터입니다. 그는 에디팅을 우리 시대의 가장 설득력 있는 창조행위라고 말하는데요. 재료가 널린 상황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키워가는 일은 모든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 자기 서사를 써 내려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편집으로 창작하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그의 첫 번째 연재 글을 읽어보세요!

선배, 종이 잡지 위상이 바닥인데,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까요?” 

식어 불어터진 야식을 앞에 두고 후배가 긴 한숨을 쉬었다. 눈 시리게 퍼런 형광 불빛 아래, 책상마다 위태롭게 쌓아올린 종이 더미와 일회용 커피잔이 그득했다. 사양산업에 종사한다는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잡지 시장을 덮친 2012년 어느 날의 일이다. 

당시 나는 패션,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발행하는 대형 잡지사 뉴미디어팀에서 디지털라이징 실험을 하고 있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 맹위를 떨치기 전, 애플, 어도비, 카카오, 삼성전자, KT 등 대형 IT기업들이 콘텐츠 수급을 위해 잡지사 문을 두드리던 시절이었다. 올드 미디어가의 대왕대비마마를 최첨단 기기에 적응시키기 위해선 이런 질문에 답해야 했다. “잡지란 무엇인가? 잡지는 왜 이런 만듦새를 갖게 되었나? 잡지 포맷의 이점은 무엇인가?” 

유통하는 정보량이 많아 정보를 구조화해야 할 때, 주목–선택–배제–큐레이션으로 일관된 취향이나 주장을 전하고자 할 때, 이미지 정보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때 잡지는 고유한 존재 이유를 갖는다. 특히 내가 몸 담았던 패션, 라이프스타일 잡지는 아주 커다랗고 관대한 포대 같아서 그 안에 담지 못할 정보가 없었다. 세상 모든 구석에서 의미를 찾아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감독의 지난 필모그래피에서, 요즘 뜨는 골목길 맛집 목록에서, 서점 심리학 코너 책 제목에서 특정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 에디터의 일이었다.

취재 대상은 매번 바뀌지만, 원리는 같았다. 먼저 난삽하게 흩어진 다량의 잡음 사이에서 유의미한 재료를 수집한다. 고품질의 정보나 스킬을 가진 전문가 혹은 취재원을 찾아낸다. 취재를 통해 모은 정보를 분류하고, 정보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의미가 동시대 시장과 독자의 마음에 견고하게 자리 잡도록 맥락과 포지션을 정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에디터적 사고력을 자극할 겸 간단한 놀이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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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무작위 상태의 현상이 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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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비슷하게 생긴 것을 분류했나? 출발이 좋다! 계통을 파악해 종류를 나누는 건 에디팅의 기본이다. 자, 다음엔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 어떤 정보 관계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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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1–6번

누군가는 수량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이 갈 것이다. (1)
서로 다른 4가지 조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도 있다. (2)
아예 조형을 곡선형과 직선형으로 구분해 대비시킬 수도 있다. (3)
다수를 차지한 까만 점에 가장 신뢰할 만한 가치가 담겼다고 믿을 수도 있다. (4)

가장 소수인 하얀 원에 대안적 가치가 담겼다고 믿을 수도 있다. (5)
만약 당신이 까만 점과 세모의 수량 차이와 별과 하얀 원의 수량 차이가 ‘1’로 동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브라보! 독특하고 훌륭한 관점이다. (6)

위의 놀이에서 경험한 것처럼 에디팅은 특정 정보에 주목하고 의미의 맥락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같은 현상도 어떤 정보 관계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에디터는 자신이 선택한 의미와 메시지가 동시대 시장과 독자 마음 속 인식의 지형도에서 어디쯤 위치할지 예측하면서 내용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 흐름에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기획’에 관한 이야기다. 잡지 에디터의 중요 업무인 ‘시각화’ 작업에 대해선 아직 언급도 못했다. 종이 잡지는 보통 기사마다 구성과 레이아웃이 다르다. 한 권의 잡지에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픽토그램, 표, 그래프, 지도 등 다양한 속성의 이미지가 공존하며, 텍스트 역시 헤드라인, 서브헤드, 리드, 바이라인, 보디 텍스트, 발문, 캡션으로 나뉜다. 잡지 에디터는 여러 창작자와 협업하면서 자기 지면의 총감독 역할을 한다. 모든 이미지와 텍스트 요소를 파악하고 지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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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점이 대세라고 말하고 싶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레이아웃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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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곡선형과 직선형 조형이 혼재한다는 정보를 전하는 레이아웃 예시

까만 점과 세모의 수량 차이와 별과 하얀 원의 수량 차이가 ‘1’로 동일하다는 정보를 강조하는 레이아웃 예시

이런 이유로 잡지의 읽기 경로는 책과 분명 다르다. 책은 보통 단일 저자의 목소리를 선형적으로 따라간다. 잡지는 여러 화자가 갖가지 방향에서 등장하며 독자의 주의를 빼앗는다. 서로 다른 크기의 텍스트 덩어리와 이미지가 시선 경쟁을 한다. 독자는 덩어리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눈이 가는대로 띄엄띄엄 훑다가 관심이 가는 내용을 발견하면 그제야 ‘읽기 모드’를 활성화한다. 어쩐지 익숙한 풍경 아닌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융합 가능성을 최전선에서 실험해 온 잡지 지면은 이미 오래 전부터 멀티미디어, 터치 버튼, 하이퍼링크가 주의력 뺏기 경쟁을 하는 디지털 환경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잡지가 사양산업이라고 모두가 외치던 2012년, 이직을 고민하던 후배에게 이렇게 답했다. 

“잡지가 망해가는 게 아니고, 세상이 온통 잡지화 되는 것 같아. Editor’s Pick, 리얼 룩, 하우투 같은 잡지 문법이 슬슬 애플리케이션으로 나오잖아. 설사 종이 잡지가 사라진다 해도 정보와 맥락을 다루는 에디터라는 직업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더 많아질 걸?” 

10년 전 예언은 현실이 됐다. 스트리트 리얼 룩 콘텐츠는 ‘스타일쉐어’가, 인테리어 집들이 콘텐츠는 ‘오늘의집’이, 코스메틱 품평 콘텐츠는 ‘화해’가 서비스로 만들었고, 포털 사이트는 아예 조인트 벤처로 잡지사를 차렸다. 기업과 브랜드가 스스로 미디어가 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유통 커머스, 부동산 디벨로퍼, 플랫폼 스타트업 등 미디어 산업 바깥에서도 에디터 직군을 채용하는 시대가 됐다. 

나아가 이 정도면 온 국민이 ‘준準에디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SNS에 올릴 사진과 영상을 고르고 편집하고, 보디 텍스트를 쓰며, 자기만의 해시태그를 정해 콘텐츠 아카이브를 한다. 수많은 데이터에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스스로 큐레이션해 상황별 추천 음악 플리를 만들고, 영감 수집 부계정을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동시대 시각 예술은 어떤가. 나는 요즘 미술관에서 ‘아, 이 작가는 대단한 편집자다’라고 감탄할 때가 많다. 구상 미술을 감상할 땐 작가의 붓질, 손놀림, 조형 기법에 감탄하지만, 동시대 미술을 볼 땐 작가의 편집자적 관점에 감탄한다. 정말 그렇다.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나 사물을 모으고, 분류하고, 합치고, 교차하고, 변형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아티스트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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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두께가 쌓이듯 자연스럽게 찢기고 덧붙여진 파리 길거리 포스터 지층을 있는 그대로 떼어 작품으로 발표한 자크 비에글레Jaques Villeglé.

누군가는 ‘잡음’이라고 여기는 사물이나 현상에서 ‘신호’를 포착하려는 태도는 에디터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자크 비에글레, 122 rue du temple›, 1968 © 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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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87 시집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가 결코 우연을 없애진 못하리라』에 대해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말라르메는 기존의 관습적인 활자술 대신 다양한 크기의 서체 배치를 통해 시어를 시각화하는 시도를 했는데, 시집 출판 이후 타이포그래피, 구체시, 아트가 출현하는 데에 커다란 발판이 됐다.

벨기에 예술가 마르셀 브로에타스Marcel Broodthaers 이에 대한 오마주 아트 작업을 하면서 원문의 문장을 검정색 영역으로 표시해 추상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 이미지, 지면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은 에디터의 주된 업무 하나다.

마르셀 브로에타스,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1969 © 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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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0년에 열린 «낯선 전쟁» 전에 전시되었던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설치 작업. 1910년대부터 전쟁에서 사용된 실제 폭탄 외관을 실물 크기 시트지로 재현했다. 1945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부터 1961 소련에서 만든 역대 최대 규모 수소폭탄까지, 인류 최악의 살인도구가 매끈한 금속성을 뽐내며 관람객 머리 위로 떨어진다. 하나의 관점으로 비슷한 계통의 사물이나 현상을 분류하고 시각화 하는 에디팅의 기본이다

아이 웨이웨이, Bomb, 2019 © 최혜진

프랑스 파리의 멋진 현대 미술 공간 팔레 도쿄를 창립하고,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하기도 미술비평가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 자신의 저서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이렇게 썼다.

이제 예술적 질문들은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가 만들 있는가?’ 아니라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있는가?’이다.”

에디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설득력 있는 창조 행위다. 상품, 지식, 뉴스, 데이터, 예술 작품 모두 현기증 날 정도로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보 공해(infollution)’는 갈수록 심해진다. 고려할 사항이 지나치게 많을 때 선택할 자유는 기쁨이 아니라 노동이다.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큐레이션에 취향, 호기심, 탐구심, 판단력을 외주화하는 일이 늘어가는 이유다. 재료는 널려 있는데, 자기만의 관점을 키워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편집으로 창작하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직업적 스킬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어떤 직업을 가졌든 모두 자기 서사를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자기 서사란 ‘특정 사건에 주목하고 맥락을 만들어서 의미를 덧붙인 기억의 모듬’이다. 자기 서사는 자존의 뿌리다. 불행한 일을 겪고도 놀라운 회복탄력성으로 주체의 자리를 되찾고 나아가 주변에 영감을 주는 이들은 이 ‘편집권’의 놀라운 권능을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힘은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있다.  

앞으로 ‘편집으로 창작하기’ 연재에서 에디팅 행위에 숨어있는 함의와 창조성을 탐구하기 위해 동시대 예술가, 크리에이터의 작업을 두루 살필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에디팅의 첫 걸음인 ‘수집’이 어떻게 예술적 행위로 거듭나는지 온 카와라, 쟈니 레이노넨, 박혜수, 마크 디온, 아이 웨이웨이 등의 사례를 통해 밝혀보려고 한다.

Writer

최혜진(@writer.choihyejin)은 19년차 잡지 에디터다. «디렉토리»«1.5°C»«볼드저널» 편집장으로 일했고, 에디터십을 기반으로 기업의 브랜드 미디어 전략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우리 각자의 미술관』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등 일곱 권의 예술서를 썼다. 동료애 기반의 에디터 커뮤니티 Society of Editors(@society.editors)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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