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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Project

가곡의 박민희, 박민희의 가곡

Editor: 전종현, 김재훈
, Photographer: 김영훈
박민희가 작업실 소파에 앉아있다.

Artist Project

아티스트와 나눈 깊은 대화를 시리즈로 만나봅니다

«비애티튜드»는 아티스트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업 세계와 창작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해요. 첫 번째 주인공은 공연예술가이자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박민희 작가입니다. 한국 전통 성악을 전공한 그는 〈가곡실격〉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가곡의 핵심인 형식미를 파괴하는 실험적인 작업으로 평단의 중심에 선 지 벌써 10년째랍니다. 최근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음악축제인 SXSW에 초대되는 등 대중음악 신에서도 큰 화제를 모으고 있어요. 박민희 작가와 나눈 다채로운 이야기를 아티클 시리즈에서 만나보세요!

아티스트 프로젝트 01: 박민희

«비애티튜드»는 특정 아티스트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작업 세계와 창작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아티스트 프로젝트Artist Project’를 선보인다.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공연예술가이자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민희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국 전통 성악인 가곡을 공부해온 박민희는, 자신이 몸담아온 전통 음악계와 가곡에 대한 회의감과 애정을 드러내는 ‹가곡실격›을 시작으로 공연과 퍼포먼스 아트를 전개해왔으며, 현재는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로 대중음악 산업에 진입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작업을 시작하고, 전개하며, 중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과 그 태도에 주목하며 총 세 편의 인터뷰를 발행한다.

Part 1.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

Part 2. ‘소닉 노스탤지어’에 관한 문답

Part 3. 창작자로서의 애티튜드

우리는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창작자가 다양한 영감과 정보를 얻고, 서로의 입장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지속가능하고 흥미로운 창작 생태계가 구축되길 응원해본다.

Part 1: 가곡의 박민희, 박민희의 가곡

공연예술,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존재감을 내비추는 박민희. 그가 선보이는 활동의 근저에는 한국 전통 음악인 ‘가곡’이 존재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이 ‘가곡이 무엇인지’에 대한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에게조차 생소한 전통 음악, 가곡을 익힌 그가 가곡을 자의적으로 실격시키며 평단의 중심에 선 지 벌써 10년이다. 그의 다채로운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작가님은 한국의 전통 성악인 ‘가곡’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인데요. 가곡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지역성이죠. 가곡은 17~18세기 즈음 ‘서울 지역’에서 유행했던 노래를 콕 집어 말해요. 요즘은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서울에서 유행하는 노래와 부산에서 유행하는 노래 간에 큰 차이가 없잖아요. 하지만 옛날에는 특정 시대에 특정 지역이 갖는 지역성이 상당히 강하고 중요했어요. 서울에 사는 사람, 전라도에 사는 사람,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각자의 성격, 말씨, 문화적인 경험들이 무척 클 수밖에 없었죠. 각 지역에서 유행한 노래들도 달랐고요.

아, 그렇다면 가곡이란 당시 서울의 유행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럼 판소리와는 어떻게 다른거죠?

판소리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방점이 있고, 가곡은 그 노랫말이 되는 정형시를 ‘부르는 것’ 자체가 중요해요. 즉, 판소리는 소설이고 가곡은 ‘시(詩)’인 셈이죠. 그 때문에 은유적이고 절제해야 하는 가곡은 그 미묘한 뉘앙스를 색깔, 음색, 음향의 측면에서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죠. 미디어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전통 음악을 정의할 때 흔히 사용하는 ‘흥’과 ‘한’의 정서와는 다르답니다.

‹한국의 인류유산: 읊으면 시가 되고 부르면 노래가 되는 우리 전통의 성악곡, 가곡› © KBS

한국 전통 음악을 14살 때 처음 접한 이후 국립국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악과 및 동 대학원을 거쳐 지금까지 20년 넘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국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지네요.

우연이었죠. 제가 14살 때 아버지가 차를 타고 가시다 라디오에서 어느 남자분이 부른 가곡을 듣고서 반하시고는 방송국에 전화해서 알아보셨죠. 방금 나온 노래를 누가 부른 건지. 그렇게 가곡을 배우러 가시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제게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같이 다니다 선생님이 제게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국립국악고등학교라는 예술고등학교가 있는데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 관심이 없고 뭔가 예술 쪽으로 빠지고 싶던 제 입장에서는 너무 좋았어요. ‘드디어 예고의 문이 열리는 건가!’ 하면서요. 하하. 그 신기한 소리에 재미 들려 버스 정류장에서도 연습하던 가곡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저 좋았던 것 같아요.

오랜 교육을 마친 후 2011년부터 ‹가곡실격› 시리즈를 발표했습니다. 기존 가곡의 형식미를 해체하며 화제가 되었는데요.

가곡은 형식이 중요해요. 노래할 때 두 눈은 한 군데를 응시해야 하고, 몸도 움직이면 안 되고, 표정도 없어야 하고, 한복을 입고 머리를 가운데 가르마로 쪽져야 하고, 반주 편성과 세션은 항상 정해진 악기로만 하고, 제약들이 많고 견고했죠. 물론 여기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장르는 지금 과연 살아있는 건지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한국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그 누구나 아는 것이 창작가가 곧 연주자이고, 연주자가 곧 창작자라는 사실입니다. 연주자가 연주를 통해 숙련된 다음 창작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게 전통 음악의 자연스러운 본질이라고 보거든요.

당시 판소리나 다른 전통 음악 장르들은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동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려고 여러 노력을 하고 있었어요.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계속 시도를 해서 살아 있게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하지만 유독 가곡만은 어떤 새로운 시도도 없이 19세기에 굳어진 형식을 계속 고수하더라고요. 예전 규칙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무 도전도, 실험도 없는 상황을 보니 저라도 가곡을 흩트려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17세기의 가곡은 계속 변주를 거듭하는 즉흥성을 가지고 있었고, 어차피 이 반항과 해체는 가곡에 대한 제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 ‘가곡이라는 음악을 실격시키며, 그것을 10년 넘게 배운 스스로도 실격시키자. 다 같이 격조 없이 실격된 것을 한번 봐봅시다!’란 생각으로 ‘실격’을 시작한 거죠. (웃음)

‹가곡실격: 쓸쓸쓸›, 2011. 여창가곡 평조 이수대엽 ‘버들은’ 노래에 목소리를 덧입혀 가곡의 형식미를 깨뜨린 실험작이다.

‹가곡실격: 쓸쓸쓸›, 2011. 여창가곡 평조 이수대엽 ‘버들은’ 노래에 목소리를 덧입혀 가곡의 형식미를 깨뜨린 실험작이다.

«2012 KBS 국악대상» 가악상 수상 무대 © KBS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평소 퍼포먼스 아트에 관심 있던 사람들은 재미있어했어요.

전통 음악 쪽은요?

별 피드백이 없었어요. ‘쟤는 이제 다른 거 하는 애구나’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오히려 더 편했어요. 사실 한 분이 제게 반응을 주시긴 했어요. 돌아가신 황병기 선생님이 실격이란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으니 ‘탈격’은 어떠냐고 제안하신 적이 있죠. 고민하겠다며 자리를 떠난 후 계속 머리에 남아서 메일을 드렸어요. 탈격으로 바꾸면 어감이 와닿지 않는다며 실격일 때의 뉘앙스가 여러가지 이유로 더 좋을 것 같다고요. 그랬더니 알겠다고 답장을 주셨던 게 기억나요.

가곡을 배운 스승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나요?

제게는 별말씀 없으셨는데 나중에 어떤 친구에게 이러셨대요. “걔, 똑똑하더라.” 그 말을 듣고 저는 무척 좋았어요. 누구보다 명맥을 이어나가려 노력하시는 분이라 저의 ‘실격’이 싫으셨을 수도 있는데 그 정도 말만 해주신 것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라고 허락받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좋든 싫든, 너의 작업은 이 시대에 있어도 될 만한 작업이다’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죠.

‹가곡실격:나흘 밤›, 아르코미술관, 2014 © 아르코미술관

‹(    ) 산책›, 2014 © 한국문화재재단. «2014 궁중문화축전»에서 진행한 예술 접목 프로젝트 창덕궁 ‹비밀의 소리›에서 시각예술작가 로와정과 함께 한 작업이다.

‹(    ) 산책›, 2014 © 한국문화재재단. «2014 궁중문화축전»에서 진행한 예술 접목 프로젝트 창덕궁 ‹비밀의 소리›에서 시각예술작가 로와정과 함께 한 작업이다.

‹가곡실격: 한바탕›, 아트선재센터, 2018 © 아트선재센터. 김세은, 박민희, 정지현의 «하루 한 번»과 연계한 퍼포먼스다.

‹권주가›, 2018 © Park Ui Ryung

‹권주가›, 2018 © Park Ui Ryung

‹춘면곡›, 2018 © Park Ui Ryung

‹춘면곡›, 2018 © Park Ui Ryung

‹가곡실격›은 현재까지 네 작품을 발표했고, 그 이후에 시작한 ‹12 LAND›도 네 작품을 만들었는데 현재 두 시리즈 모두 잠정 중단된 상태입니다. ‘작업에 내포한 질문이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하셨죠.

두 연작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했어요. ‘가곡이란 음악이 근대화를 겪지 못했다.’ 한국이라는 사회 역시 문화적으로는 근대라는 시기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그중에서도 가곡은 이런 위치를 점하고 있죠. 한국이 식민지화를 겪기도 하고, 자본주의가 등장하며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했는데, 그 시절을 아예 집 안에서 숨어 있다시피하다 20세기 말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 바뀐 세상에 적응을 전혀 못 하는 거죠. 가곡은 지형에 근거한 지역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근데 지금의 지역성은 인터넷과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그 간극 때문에 10개 가까이 되는 공연을 만들다가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온라인에서 탄생한 언어와 지형, 혹은 계층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지형도가 그려지는데, 내가 가진 문제의식은 현재 상황에 비추어볼 때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문제가 발생하는 사회적 구조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물리적 지형에 근거한 지역성과 20세기 제국주의에 기반을 두고 던지는 물음은 시효가 지났다고 느꼈어요. 자본주의의 방식과 영향력도 완전히 달라졌고요. 일단 저 자신부터 설득이 안 되더라고요.

그 ‘설득’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가능한가요?

지금도 계속하는 공연 중 ‹가곡실격 : 방 5›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연주자가 수행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어느 정도 유사하게나마 청취자가 느낄 수 있을까?’란 음악 청취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깃들어 있죠. 아주 작은 방에 노래하는 사람과 관객이 가까운 거리에 앉은 후, 듣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가곡을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가곡실격: 방5›, 2014 © Festival Bo:m. 페스티벌봄에서 선보인 작업으로 청중과 연주자 간의 거리를 극적으로 좁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극장에 가면 바로 옆자리에 앉은 관객의 반응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극장 내부 분위기에 휩쓸리며 감상하기도 하죠. 그런데 감상에 대한 가이드 없이 가곡이라는 생소한 콘텐츠를 아주 직접적으로 전달하면 그 관객은 콘텐츠 자체에 직면할 수밖에 없어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자본을 통해 현상을 분석하고 시즌마다 취향을 구성하며 지금 이 정도는 들어줘야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거라고 유행을 선도하잖아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반응을 유추하며 콘텐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아차리는데 ‹가곡실격 : 방 5›의 감상 조건에서는 이 자본의 개입이 좀 멀어지는 거죠. 이러한 작품 같은 경우에는 현재에도 충분히 유의미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2020년에 들어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었죠. 그래서 이것도 시효성이 지났구나,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그 ‘설득’은 20세기 기반의 식민주의, 자본주의, 약자성에 대한 얘기를 21세기 버전으로 재배열하지 않으면 아직 힘들 것 같아요.

2019년 타악기 아티스트인 혜원과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를 결성했어요. 두 창작자가 팀을 꾸린 배경이 궁금해지네요.

혜원 씨 무대를 처음 본 건 2017년이었어요. 당시 저는 언젠가 협업을 하게 된다면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는 뮤지션과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제가 혜원 씨의 공연에서 좋았던 점은 그가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또 다른 관심사인 전자음악을 자유롭게 시도하는 모습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전통 음악을 다른 장르의 장식물로 이용하려는 태도가 전혀 없어서 더욱 마음이 설렜죠. 게다가 저희 둘의 조합은 상호보완이 확실해요. 저는 목소리를 레이어로 쌓는 식으로 작업을 구상하는데 비트에 약하거든요. 반면 혜원 씨의 경우, 노래 없이 비트를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비트에 노래도 함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었지만, 노래는 해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목소리에 혜원 씨의 비트만 얹혔는데 음원이 나오는 경우가 있답니다.

근데 팀 이름은 왜 해파리죠? 입에 착착 감겨서 좋아요.

지금은 동물 전시에 반대하지만, 언젠가 수족관에 갔을 때 해파리를 접하며 너무나 아름답다고 탄성을 냈어요. 나중에 팀으로 활동한다면 팀 이름은 꼭 해파리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혹여나 누가 선점할까 봐 제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먼저 써버렸답니다. (웃음) 혜원 씨와 팀을 결성할 때 너무 진지한 의미가 담기지 않고, 발음하기 쉽고, 딱 들으면 기억에 남는 팀명을 정하자고 했는데, 해파리를 말했더니 자기 어렸을 적 별명이었다는 거예요. 이건 운명이라 생각했죠. 하하.

사실 요즘 뮤지션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죠. “우리는 우리의 장르를 규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음악 자체가 하나의 장르이다.” 이런 흐름과 대조되게 해파리는 자신을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라고 명명하고 있어요. 자칫 스스로를 제한시킬 수도 있는 선택인데, 어째서 해파리는 자신을 먼저 밝히나요?

정체성 측면에서 전략적인 선택이었어요. ‘우리 음악이 하나의 장르’라고 자유롭게 말하는 건 보편적인 세계에 쉽게 편입되는 음악 소재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재즈를 하든 록을 하든 거기에 전통 음악 요소가 들어가면 그 음악에 무조건 ‘국악’의 프레임을 씌우곤 해요. 예를 들어 어떤 뮤지션이 재즈라는 장르적 문법에 충실하게 연주를 하더라도 전통 악기를 사용한다면, 재즈 씬에서는 그를 재즈 뮤지션으로 보지 않아요. 뭐, 물론 음악의 완성도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국악기가 들어가는 순간 여지없이 ‘국악’이 되어 국악계에 소환되죠. 그만큼 국악기에 대한 이해나 다양한 관점이 없고, 원하든 원치 않든 국악 뮤지션으로 계속 호명되면서 재즈 뮤지션의 면모에 대해서 깊이 있는 비평이 생길 기회가 사라져요. 인간 사회는 언제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회에서 국악은 일종의 핸디캡이죠. 잘못한 것 없이 저평가받거나, 잘한 것 없이 칭찬받거나.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음악으로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먼저 얼트 일렉트로닉이란 장르를 밝히면서 활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지요.

해파리의 음악적 신조는 무엇일까요?

일단 남을 흉내 내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좋아 보인다고 억지로 하지 말자. 그리고 재미없는 건 하지 말자. 말초적인 차원의 재미가 아니라 부끄러운 짓에 해당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런 부끄러움은 삼가자. 그리고 음악으로 돈을 벌어보자. 안 팔리더라도 대중음악 산업에서 활동하는 게 중요했어요. 전통 음악이 단지 사운드 소스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음악적 맥락과 문법을 그대로 가지고 주류 음악 산업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완전 다르거든요. 그걸 실현해보고 싶었어요.

‹소무-독경›, 2021 © NAVER 문화재단. «온스테이지 2.0»에서 진행한 해파리의 공연.

공연 예술을 하던 작가로서 대중음악을 지향하는 해파리 활동이 어색하진 않나요?

창작자로 활동할 때는 예술적 가치와 작업 윤리의 기준을 높게 세우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막상 제 작업이 스스로 세워둔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내적인 좌절을 자주 겪었죠. 반면 해파리로 활동할 때는 마음이 너무도 가벼워요. 해파리의 음악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거나 깊은 사유를 경유하는 예술로서의 음악이 아닌 실용 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파리의 작업 윤리는 한국 전통 음악을 대상화, 타자화하지 않은 채로 음악 산업에 편입하는 것, 그 최소한의 기준만 지키면 돼요. 예술적인 성취는 각자 알아서 하자는 말까지 혜원 씨와 나눈 적이 있었죠. 그만큼 해파리는 대중음악 산업 안에 안착해 평범한 ‘음악’으로 소비되는 것, 특정 사운드나 소수의 음악 문법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음악 산업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기형적으로 쉽게 주목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나, 기존의 음악 산업에 안착하는 게 목표라서 상대적으로 마음이 훨씬 편한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해파리는 굉장히 빠른 성취를 이루었죠. 세계적인 음악 축제 SXSW에서 공연도 했고,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로 유명한 NPR Music에서 기대주로 뽑혔잖아요.

NPR Music의 제작자가 언급한 건 정말 의외였어요. 뮤지션으로서 무척 기뻤죠. 산업에서 진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니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해파리의 음악을 ‘한국 음악’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음악’의 관점으로 바라봐주었어요. 전통 악기를 사용하거나 전통 음악을 재구성했다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음악적인 아이디어 위에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고, 그런 레이어가 수많이 쌓여서 앞으로의 전개 과정이 기대된다는 평을 해주었죠.

2021년 SXSW 온라인에서 선보인 해파리의 세계 데뷔 무대. ‹형가›‹소무›‹송신›을 잇달아 공연했다. © Flipped Coin Korea

정말 ‘음악’으로서 바라봐줬던 거군요.

바로 그거예요!

한국 전통 음악을 기반 삼아 활동하며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뮤지션들의 선례가 있죠. 씽씽, 이날치, 박지하, 잠비나이 등이 대표적인데, 해파리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걸까요?

말씀하신 흐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거랑 비슷해요. 백인만 주류로 가시화되는 사회에서 한국인 몇 명이 나타날 때 “요즘에는 한국인이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게 흐름인가?” 이렇게 얘기하는 거요. 근데 모든 인종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회라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까요. 전통 음악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팀도 마찬가지예요. 흐름이 아니라 잘하는 한두 팀이 나와서 주목을 받았을 뿐이죠. 장르적으로는 서로 다른 음악을 해요. 이날치는 얼트 팝, 박지하는 미니멀 앰비언트 스타일의 뉴에이지 혹은 네오 클래식, 잠비나이는 포스트록… 이렇게 그들의 음악을 국악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개별적으로 섬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다면 흐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사용한 악기나 사운드가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골조를 이루는 음악 문법과 태도를 먼저 읽는 게 선행되면 좋겠습니다.

아티스트 프로젝트 01: 박민희

Part 1. 작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 ‹가곡의 박민희, 박민희의 가곡›

Part 2. ‘소닉 노스탤지어’에 관한 문답 ‹박민희가 말하는 소리와 기억›↗

Part 3. 창작자로서의 애티튜드 ‹박민희라는 창작자의 애티튜드›↗

Artist

박민희는 공연예술가이자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 멤버다. 가곡·가사·시조를 노래하는 성악가로서 한국의 사회적 지형에서 전통음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의미와 방법론을 찾아가는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음악의 구조 및 사회적 의미 등 실질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들을 작품의 구성 조건으로 적용해 노래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의 장치적 맥락을 재편성한다. 대표작으로 ‹가곡실격› 시리즈와 ‹처사가› ‹춘면곡› ‹마음 닿지 않는 곳에› ‹패스, 퍼레이드, 대취타› 등이 있고 KBS 국악대상 가악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트체인지업 상을 수상했다. 해파리는 올봄 세계 최대 음악 마켓 SXSW 쇼케이스를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했으며 ‘타이니 데스크Tiny Desk’로 유명한 NPR의 프로그램 ‘올 송스 컨시더드All Songs Considered’가 선정한 2021년 SXSW 기대주 11팀에 포함됐다.

Edito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WWD 코리아» «LUXURY» 등 다양한 매체에 디자인, 건축, 공간, 라이프스타일 관련 글을 기고한다.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Photographer

김영훈은 2006년부터 사진 커리어를 시작해 2008년 미국 뉴욕의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에 사진 전공 최우수 장학생으로 입학해 4년간 공부와 전시를 병행하며 2012년 Honor Student로 졸업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2013년 솔트 스튜디오를 열고 비주얼 아트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NYLON» 포토 디렉터를 지냈으며, 현재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IKEA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의 제품과 라이프스타일을 사진이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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